(마을기행89호) 도암면 계라리 계산마을
(마을기행89호) 도암면 계라리 계산마을
  • 김철 기자
  • 승인 2002.10.24 00:0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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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기행 도암면 계라리 계산마을〈89〉

옷깃을 여미게 하는 가을날씨속에 도로가에서 머리를 흩날리는 갈대의 모습은 황금색의 들판과 대조를 이룬다. 높다란 바위로 문을 이뤄 붙여진 도암면 석문을 바로앞에 두고 차량이 겨우 지나다닐 수 있는 마을진입로를 따라 5분여를 오른쪽으로 달려가면 봉덕산 아래에 자리한 계산(桂山)마을이 나타난다.

마을진입로를 따라 넓게 자리한 논을 앞에두고 있는 계산마을은 마을옆에 위치한 계산제에서 나오는 물로 비옥한 농토를 유지했을 것이라고 추측하게 한다.

마을에서 고인돌이 발견되어 선사시대부터 주민들이 생활했던 것으로 확인되는 계산마을에는 마을상단에 위치한 절터로 봐서 남향홍씨가 처음 입촌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나 증빙자료가 불분명하고 남양방씨와 해남윤씨가 마을에 처음으로 들어온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현재는 19가구 30여명의 주민들이 남양방씨와 해남윤씨, 광산김씨등 10여개의 성씨가 마을을 조성하고 있다.

마을뒤에 위치한 봉덕산의 모습이 닭형국을 닮아 계산(鷄山)마을로 불리우다 계수나무를 정자나무로 삼아 계수나무桂로 바뀐 계산(桂山)으로 불리게 됐다.

인근 영동마을로 가는 골짜기에는 수원이 풍부해 가뭄을 타지 않았다는 가장골이 있고 마을뒤 봉덕산에는 달이 떨어져 바위가 두갈래로 갈라졌다는 달바우, 지석리로 넘어가는 봉덕산줄기로 범의 침범을 막기위해 입석이 있었다는 덕골재, 폐교된 도암북초등학교로 가는길로 구불구불하게 생겼다는 도롱골, 영동마을과 경계되는 등성이로 소나무가 많고 백로가 서식한 도암등이 위치해 있다.

지금은 길다란 소나무들이 모습을 감춘 상태지만 나무가 많아야 마을이 부유해진다고 믿는 주민들이 아끼는 등성이다. 봉덕산 골짜기에는 호랑이가 자주 출몰해 붙여진 범골, 서당터가 남아있어 붙여진 서당골, 가뭄이 들어도 마르지 않을 정도로 풍부한 물이 흘러 붙여진 풍덕골, 널다른 바위에 밤에도 불을켜고 불공을 들였다는 불선바위등이 마을에 위치해있다.

계산마을에서는 매년 12월20일 마을총회를 열어 마을임원을 선출하고 3가구씩 유사를 정해 마을회관에서 잔치를 벌인다. 과거 한마을이였던 영동마을과 상포계를 조직해 애경사때에는 장례가 끝날때까지 일을 도와준다.

찾아간 마을의 첫모습은 가을의 전경을 볼 수 있었다. 콤바인작업으로 바쁘게 움직이는 농부들의 모습은 가을의 풍부함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마을입구에는 수확한 벼를 말리는 주민들의 발놀림으로 분주했다.

주민들에게 물어 20여년간 마을이장을 맡아봤던 윤칠하(68)씨를 찾았다. 마을의 곳곳에 대해 자세한 설명을 해주던 윤씨는 “젊은사람들은 공부를 위해 다들 객지로 나가고 없다”며 “정년퇴직한 직장인이나 농민들이 마을을 지키며 살고 있다”고 밝혔다. 이어 윤씨는“예전 계산마을은 마을앞에 넓은 문전옥답이 많아옛날부터 부촌으로 유명했다”며 “교통시설이 불편하고 농사에 대한 관심이 줄어들면서 마을인구가 점차 줄어들고 있다”고 말했다.

계산마을에서는 고인돌을 빼놓을 수 없다. 선사시대부터 마을에 주민들이 정착했을 것으로 추정하게 되는 고인돌이 두곳에 나누어 분포돼 있다. 마을의 북쪽에 위치한 윤봉호씨집에는 길이2m에 높이 1m정도의 대형 고인돌이 4기가 집안에 놓여있고 옆 텃밭에도 3기의 고인돌이 놓여있다. 또 마을의 동쪽에도 5기의 고인돌이 놓여있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나 현재는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또 하나의 볼거리는 마을입구에 놓인 선돌이다. 예전 정월보름날 주민들이 찾아와 안녕과 무병장수를 빌고 아들을 낳기를 비는 주민들도 있었다. 봉덕산을 앞에둔 계산마을에서는 마을의 양쪽에 두개의 선돌이 위치해 있었다. 이 선돌들은 마을의 수호신역할에 산간지역에 나타나기 쉬운 호랑이도 쫓아준다는 주술적의미를 같이 나타냈다.

계산마을주민들은 한가지 바램이 있다. 마을앞 진입로의 확포장공사로 군내버스가 운행되기를 바란다. 마을에서 군내버스가 다니는 도로까지는 1.3km 정도가 떨어져있어 도보로 다니고 있다. 매일 운행이 힘들 경우 5일장이 열리는 일주일에 한두번씩이라도 운행 되기를 바라고 있다.

시골에 살고 있는 부모들은 자식들의 대학교육을 위해 논답을 팔아 공부시키고 굽어진 허리를 펴지도않고 일을하면서 자식들의 건강을 기원한다. 힘든 농사일에 매달려 살아가는 고단한 삶을 살아가는 주민들은 자신을 위해 한봉지의 약을 사먹는것보다 자식이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뿐이다.

마을출신으로는 강진향교 전교를 지냈던 윤재평씨, 전라남도 도청 산림과장을 지냈던 방희주씨, 숙명여대교수로 재직중인 윤원배씨, 수원전문대학교수로 재직중인 방창엽씨, 강진농고 교장으로 근무했던 윤옥현씨, 광주전화국 시설과장을 지냈던 방민주씨, 광주지방병무청 총무과장을 지냈던 윤재영씨, 서울 봉천동에서 경찰로 근무중인 윤삼은씨, 신전면사무소에 재직중인 이생민씨가 마을출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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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유정 2020-10-21 17:33:22
혹시 이 기사에 사용된 마을 주민들 사진, 파일을 받을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