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화 아가씨에 대한 감사의 눈물
연화 아가씨에 대한 감사의 눈물
  • 강진신문
  • 승인 2023.11.10 0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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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동네 옛 이야기 - 동성리 사의재길(5)] 벼락수골 이야기(Ⅲ)

'우리 동네 옛이야기'는 강진의 숨겨진 역사와 문화 이야기를 동화로 묶은 우리 강진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지난해 11월 네 번째 책, '우리동네 옛 이야기-동성리 사의재길'을 출간했다. 이번 책은 장미연·김옥애·강현옥 글, 김충호 그림으로 만들어졌다.
강진 사람이 모여서 함께 쓰고 그린 작품집이라 그 울림이 더 크고 우리들만의 소중한 공감대가 있다. 책을 통해 강진은 어떤 곳인지를 어렴풋하게 밝히는 마음속의 '등' 하나가 '반짝'하고 켜지길 기대해본다./편집자 주

 

목화마을 앞 미나리꽝

 


먹으면 미치광이처럼 웃다가 심하면 죽음에 이르게도 한다 해서 미치광이풀이라고도 불리는 풀이야. 무슨 생각인지 흑운은 미치광이 풀을 뿌리째 캐서 망태기 가득 담았단다.

"흠,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백운 네가 그리도 이 형을 우습게 안단 말이지? 그리도 웃는 게 소원이라면 실컷 웃게 해주마. 미치광이 같은 네 모습을 보고도 연화 아가씨가 웃어주는지 어디 두고 보자."

흑운은 무서운 얼굴을 하고 산을 내려왔어.

그날 저녁 흑운은 동생 백운의 국그릇에 기어이 미치광이 풀을 넣었단다. 그 사실을 알 리 없는 흑운은 "연화 아가씨가 직접 해준 밥이라 그런지 아주 맛있습니다." 하며 국 한 그릇을 깨끗이 비웠단다. 그리고는 밥알을 세듯 먹고 있는 형에게 또 조롱하듯 시비를 걸었지.

"왜 밥을 그리 드십니까요? 형님은 전혀 입맛이 돌지 않나 봅니다. 하기야 웃어주는 이도 없으니 어디 사는 게 재미가 있겠습니까?"
"뭐라고? 그래, 실컷

조롱해보거라. 네 놈 그 조롱이 언제까지 계속되나 보자."
"조롱이라니요? 형님을 걱정해서 그런 게 아닙니까? 혼자 너무 외로워 보여서 말입니다."
"허? 누가 외롭단 말이냐?"
"형님이…이히히…형님이 말입니다. 웃어주는 이도 없는 이히히히…형님이 너무 외로워 보여서…이히히 어쩝니까요?"

그런데 형을 비꼬던 백운이 갑자기 장난꾸러기처럼 웃어댔어.
'옳지! 이제야 약기운이 도는가 보구나.'
그 모습을 보던 흑운은 고소해서 입 꼬리가 절로 올라갔어.

"이 놈! 연화 아가씨가 네 놈을 보고 좀 웃어주었다고 네가 아주 착각 속에 빠져 사는구나. 너 같은 미치광이를 도대체 누가 좋아한단 말이냐?"
흑운은 신이 나서 슬슬 백운을 부추겼지.

"미치광이라니요? 그 무슨 어이없는 말씀이요? 이히. 이히히히히."
"실없이 웃고 있는 지금 네 모습을 보거라."
"내가 뭘 어쨌다고……. 하하하. 아이고, 사람 잡는 소리를……. 하하하하하."

 


이제 백운은 아예 말을 끝까지 맺지도 못하고 웃어댔지. 그때서야 백운은 무언가 잘못된 걸 눈치 챘지만 안타깝게도 때는 이미 늦었지 뭐야. 상을 물리러 온 연화 아가씨를 보자 백운은 거의 부르짖듯 연화 아가씨에게 매달렸어. 더 심해지기 전에 도움을 구하려고 한 거야.

"연화 아가씨! 헤헤헤헤. 날 좀, 날 좀 봐주십시오. 헤헤헤헤. 아이고 웃겨 죽겠네."
하지만 입 속에서는 말이 제대로 만들어지지 않고 요상한 웃음만 계속 새어 나왔단다.
"백운님, 왜 그러세요? 어디 불편하세요?"

연화 아가씨가 겁을 잔뜩 집어먹고 묻은 순간에도 백운의 입에선 계속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단다.
백운은 너무 웃다가 기진맥진해서 눈물까지 흘리고 있었어.
"제발, 헤헤헤 하하하하. 아, 제발, 헤헤헤헤. 연화 아가씨! 날 좀, 헤헤헤…날 좀……."
말을 하려 하면 할수록 웃음소리만 더욱 요상하게 흘러 나왔단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흑운은 은근슬쩍 한 마디를 흘렸어.

"아이고, 이 녀석이 원래 이상한 병이 있어 이렇게 실실 웃다가 심하면 사람을 물곤 한답니다. 요즘엔 괜찮아진 줄 알았더니 그 요상한 병이 다시 도졌나 봅니다. 그러니 아가씨도 조심하십시오."

그 말을 들은 연화 아가씨는 겁이 덜컥 나서 슬슬 뒷걸음질을 쳤어. 바로 그때였어.
"아니, 아니. 헤헤헤, 아니야. 하하하하하."
답답한 마음에 백운이 뒷걸음질 치는 연화 아가씨의 치맛자락을 움켜잡았어.
"에그머니나!"

아가씨는 있는 힘껏 백운을 밀어뜨리고는 걸음아 날 살려라 하고 도망쳤단다.
"아니, 헤헤헤헤"
그 뒤를 따르는 백운의 시뻘건 두 눈에서는 눈물이 샘물처럼 흐르고 있었어.
"그 놈 아주 꼴좋게 됐구나! 하하하하"

그 모습을 지켜보던 흑운은 참았던 웃음을 터뜨렸단다. 그러자 연화 아가씨를 뒤쫓던 백운은 발길을 돌려 흑운을 죽이겠다고 덤벼들었어. 입가에는 여전히 요상한 웃음을 매단 채로 말이야. 결국 두 형제 사이에는 주먹이 오가는 싸움이 다시 벌어지고 말았단다.

두 사람의 싸움은 저녁나절에 시작해서 이튿날 날이 새도록 그칠 줄을 몰랐어. 하늘에서는 이 모습을 안타깝게 지켜보고 있었지. 결국 참다못한 옥황상제는 깊은 한숨을 내쉬고 큰 결정을 내렸어. 두 사람에게 벼락을 내려치기로 말이야.

콰과광 콰광.
마른하늘에 금새 먹구름과 함께 광풍이 잃었어. 놀란 산짐승들은 이리 뛰고 저리 뛰었지. 미처 다 피하지 못한 작은 산짐승들과 산새들은 연화 아가씨 마당으로 모여들었어. 바로 그때였어.
번쩍!

섬광이 일더니 흑운, 백운 두 사람 위로 벼락이 떨어졌어. 결국 두 형제는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고 말았단다. 그런데 말이야. 벼락에 목숨을 잃은 건 두 형제만이 아니었어. 형제가 죽은 자리엔 뱀 두 마리를 비롯해 고라니, 다람쥐, 산토끼 등 크고 작은 산짐승들이 여럿 죽어 있었어.

평소 먹이를 주고 보살펴주던 연화 아가씨 집으로 피했다가 오히려 큰 변을 당한 거지. 연화 아가씨는 너무나 안타까워 한참을 울었단다. 연화 아가씨의 슬픔에 답이라도 하듯 하늘에서도 장대 같은 비를 퍼붓기 시작했어. 비는 사흘 밤 사흘 낮을 멈추지 않고 내렸단다.

사흘 뒤 비가 그쳤을 땐 하늘은 언제 그랬냐는 듯 환하게 빛나고 있었지. 살아남은 산새들은 여전히 맑은 목소리로 노래하고 있었어.
"얘들아, 미안해. 너희가 나로 인해 죽은 것 같아 너무도 미안하구나. 부디 다음 생엔 더 좋은 인연으로 만나자꾸나."

연화 아가씨도 눈물을 닦고 억울하게 죽은 산새들과 짐승들을 모아 양지바른 곳에 묻어 주었어. 그리고 조촐하게 음식을 마련해 제사를 지내주었지. 한갓 짐승의 목숨도 귀하게 여긴 연화 아가씨의 마음씨에 마을 사람들도 감동하였지.

그래서 '여제단'(여祭 [여ː제] 나라에 역질이 돌 때 여귀에게 지내던 제사. 봄철에는 청명에, 가을철에는 7월 보름에, 겨울철에는 10월 초하루에 지냈다)이라는 제각을 짓고 억울하게 죽은 짐승들의 영혼을 달래주는 제사를 해마다 지내 주었단다.

형제의 이야기가 전해져 오는 그곳이 지금의 강진읍 동성리 목화마을 벼락수골이란다. 형제가 벼락을 맞아 죽은 자리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지. 그때 억울하게 죽은 짐승들이 흘린 눈물 탓인지 벼락수골에서는 해마다 비만 오면 황토물이 내려온다고 해. 아직 억울함이 풀리지 않은 걸까? 아니면 자기들을 보살펴주고 제사까지 지내준 연화 아가씨에 대한 감사의 눈물인 걸까?
 

 



주민들의 입으로 전해지는 설화
벼락수골은 지금의 강진군 강진읍 동성리 목화마을 뒤쪽을 가리키는 이름이야. 싸움질만 하다가 하늘에서 쫓겨난 형제들은 땅 위에 내려와서도 잘못을 뉘우치지 않고 계속 싸웠어. 결국 벌로 벼락을 맞았다는 전설이 깃든 곳이지. 예나 지금이나 하늘에 산다는 신선이나 선녀 등이 등장하는 이야기는 늘 우리 귀를 솔깃하게 만드는 매력이 있어. 더군다나 아름다운 아가씨까지 등장하면 더욱 그렇지?

옛날부터 사람들 입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를 크게 아울러서 설화(說話 신화·전설 등을 줄거리로 사실처럼 꾸민 옛이야기)라고 해. 설화는 다시 그 내용이나 특징에 따라 신화, 전설, 민담으로 나눌 수 있단다. 신들의 이야기나 나라를 세운 신적인 인물 등의 이야기를 다루면 신화라고 해. 또 평범한 이들을 주인공으로 삼아 간결하고 반복적인 구성 속에 재미 있는 내용으로 행복하게 마무리 지으면 민담이고 하지.

그 중에서 전설은 나무나, 꽃, 바위, 연못 등 증거물을 남기는 이야기야.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백일홍 아가씨와 이무기 이야기, 또는 제주도의 지형(地形 땅의 생긴 모양이나 형태)과 관련된 설문대 할망 이야기가 전설인 거야. 이야기가 증거물을 남겼다기보다는 특이한 바위나 나무 등을 보며 우리 조상들이 상상력을 발휘하여 이야기를 남겼다는 것이 더 맞는 말일지도 모르겠구나.

어쨌든 벼락수골 전설도 전설이니만큼 증거물을 남겼지. 그 전설의 증거물 중 하나는 큰물이 질 때마다 반복되게 내려오는 토사야. 산에서 내려온 토사가 마을 앞에 기름진 땅을 만든 덕분인지 목화마을 앞은 예로부터 미나리꽝이 넓게 펼쳐져 있었어. 하지만 지금은 새로 난 도로로 그 미나리꽝의 모습도 많이 바뀌었더구나.

그리고 또 하나는 여제단이라는 제각이야. 한갓 짐승의 죽음도 위로해주고자 했던 강진 목화마을 사람들의 따뜻한 마음이 제각을 만들고 제사를 지내게 한 거지. 불과 50여 년 전만 해도 여제단에서는 짐승들을 위한 제사를 지냈대. 하지만 지금은 모두 무너지고 그 흔적도 대숲에 파묻혀 버렸어. 하지만 목화마을 어르신들은 아직도 여제단에서 제사 지내던 옛 추억을 가끔 회상하고 있더라고. 오랜 세월의 풍파 속에 여제단은 사라져 버렸지만 그래도 벼락수골 전설이 우리에게 전하려는 진짜 속말이 무엇인지는 꼭 되새겼으면 좋겠어.

수많은 세월 동안 인간은 많은 전쟁을 일으키고 많은 생명을 희생시켜 왔어. 한 생명을 탄생시키고 기르기 위해서는 오랜 인내와 정성이 필요하지만 안타깝게도 요즘엔 그러한 생명을 너무도 쉽고 잔인하게 희생시키는 경우가 많아. 당장에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만 봐도 얼마나 많은 생명들이 안타깝게 희생되고 있니? 또 무심한 실수로 낸 산불은 얼마나 많은 산짐승들의 생명을 앗아갔나 생각해봐. 이젠 어떤 이유로든 그런 끔찍한 일들은 다시는 일어나지 않길 바랄 뿐이야. 아주 작은 생명이라도 존중하고 함께 잘 살기 위해서 여제단을 짓고 짐승들의 영혼까지 위로했던 선조들의 마음을 배워보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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