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작은 생명이라도 존중하는 선조들의 마음
아주 작은 생명이라도 존중하는 선조들의 마음
  • 강진신문
  • 승인 2023.10.16 1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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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동네 옛 이야기 - 동성리 사의재길(4)] 벼락수골 이야기(Ⅱ)

'우리 동네 옛이야기'는 강진의 숨겨진 역사와 문화 이야기를 동화로 묶은 우리 강진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지난해 11월 네 번째 책, '우리동네 옛 이야기-동성리 사의재길'을 출간했다. 이번 책은 장미연·김옥애·강현옥 글, 김충호 그림으로 만들어졌다.
강진 사람이 모여서 함께 쓰고 그린 작품집이라 그 울림이 더 크고 우리들만의 소중한 공감대가 있다. 책을 통해 강진은 어떤 곳인지를 어렴풋하게 밝히는 마음속의 '등' 하나가 '반짝'하고 켜지길 기대해본다./편집자 주

목화마을 앞 미나리꽝

 


"연화 네가 내 방으로 건너오고 저 선비들에겐 네 방에 새 이부자리를 봐 드리거라."
"네, 어머니!"

연화 아가씨의 친절함은 정말 넘치고 넘쳤지. 아무리 손님이라고는 하지만 한 번도 본 적 없는 나그네들에게 자기 방까지 선뜻 내주는 친절함에 형제는 크게 감동하였단다.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그렇게 사이가 안 좋던 형제들도 그 순간만은 마주 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어. 연화 아가씨의 따뜻한 배려가 형제의 거친 마음도 녹여버린 거야.

몇 달이 흘렀어. 연화 아가씨의 허름한 초가삼간에서 내려다보는 강진 들녘에도 봄기운이 스며들고 있었어. 며칠만 신세를 지기로 한 손님들은 겨울이 다 가고 냉이가 꽃대를 올릴 때까지도 떠날 생각이 없어 보였지.

하지만 인심 좋은 연화 아가씨 모녀는 나가라고 재촉하는 말을 한 번도 하질 않았어. 형제들도 가난한 집안에서 거저 밥을 얻어먹긴 미안했던지 나무도 해오고 밭일도 하며 도왔단다. 마음 여린 연화 아가씨는 손님들에게 일을 시키는 것 같아 미안해서 자꾸 말렸지만 형제는 경쟁하듯 아가씨를 도왔어. 하지만 안타깝게도 날이 갈수록 그 선행은 순수함을 잃어갔지.

"아이고, 흑운님! 그만 하시래도 그러네요. 손님께 이리 폐를 끼쳐서 어쩌나요?"
지게 가득 키를 넘는 나뭇짐을 지고 사립을 들어서는 형 흑운을 보고 연화 아가씨가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어.

"폐라니요? 봄이 다 오도록 떠나지 못하고 있는 저희가 더 폐지요. 이렇게라도 도움이 되어야지요."
흑운도 미안함이 가득한 얼굴로 대답했어.

 

"어서 이 냉수 좀 들이키세요. 아이고, 이 땀 좀 봐. 이걸로 땀 좀 닦으시고요."
연화 아가씨는 흑운에게 냉수와 수건을 건넸어. 자신을 걱정해주고 생각해주는 연화 아가씨의 마음을 오롯이 혼자 느끼는 것 같아 흑운은 한없이 행복했지. 바로 그때 동생 백운이 무궁화나무를 막 돌아 마당으로 들어섰단다. 백운도 지게 가득 키를 넘는 나뭇짐을 지고 있지 뭐야.

"어머, 백운님! 백운님은 분명 아침나절까지만 해도 방에 계셨던 것 같은데……."
연화 아가씨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어. 형제는 드디어 개과천선하여 착한 일을 하며 죄를 씻어보려고 작정한 걸까? 그렇다면 얼마나 좋겠어. 그럼 두 사람이 갑자기 무슨 이상한 마음이라도 생겨서 안 하던 짓을 하는 거냐고?

그래 맞아. 두 사람은 개과천선과는 전혀 반대의 길을 걷기 시작했던 거야. 두 형제는 연화 아가씨의 아름다움에 반해 서로 아가씨를 차지하려고 경쟁하고 있었던 거지. 하늘에서 쫓겨난 죄인이라는 신분도 잊고 말이지. 또 정작 아가씨는 아무런 마음도 없는데 말이야.

"아마도 혼자 게으름을 피우고 있기가 불안했던 게지."
형이 동생을 쏘아보며 비꼬듯 말했어.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영문을 알 길 없는 연화 아가씨는 그저 형제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볼 뿐이었지.

"형님이야말로 어제 말로는 분명 오늘은 쉬겠다 하지 않았소? 이리 치사하게 놀기요?"
동생 백운도 지지 않고 형을 노려보며 대꾸했어.

"뭐야? 너 그게 형한테 할 소리냐?"
"내가 뭘요? 뭐 틀린 말 했소?"
"뭐가 어쩌고 어째? 그래 방구석에서 늘어지게 잠이나 자던 놈이 갑자기 내 뒤를 밟은 까닭은 뭔데?"

"누가 누구 뒤를 밟았다고 그럽니까? 아이고, 누가 들으면 내가 형님 뒤나 밟고 다니는 한가한 사람인 줄 알겠습니다요."
"네가 언제부터 그렇게 나무를 열심히 했다고 난리야? 그래놓고는 도둑고양이처럼 몰래 숨었다가 굳이 지금 나타나고 말이야."

"난 그저 순수한 마음으로 연화 아가씨를 도우려던 것뿐이었소. 그리고 몰래 숨긴 누가 몰래 숨었다고 그럽니까? 형님이야말로 이상하십니다. 나 없는 동안 연화 아가씨한테 무슨 수작을 부리고 있었던 겁니까?"
"아니, 그래도 이 녀석이……."
두 사람의 말싸움은 끝이 없었어. 어느 한 사람도 물러서질 않았지.

"땔나무 때문에 싸우시는 거라면 그만하시지요. 땔나무야 제가 틈나는 대로 조금씩 하면 되니 너무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를 도우시겠다는 마음이야 고맙지만 절 돕겠다고 형제끼리 싸우셔야 되겠습니까?"

형제의 싸움이 자기 때문이라는 걸 모르는 연화 아가씨는 그저 답답할 뿐이었지.
"아니, 그런 게 아니라……."

동생인 백운이 슬그머니 말꼬리를 흐리며 주춤거렸어. 그러자 형도 불같이 화를 낼 것 같던 기세를 누그러뜨렸지.
"나무를 하는 게 힘들어서 그런 게 아닙니다. 그러니 연화 아가씨가 힘들게 산에 오르진 마십시오."

다행히 연화 아가씨 덕분에 두 사람의 말다툼은 큰 싸움이 되기 전 끝났단다. 하지만 이 정도 다툼은 다음에 이어질 싸움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어.
찌옷 찌옷 찌옷 찌옷.
꾹꾹 꾸국 꾹꾹 꾸국.
소쩍 소쩍 소쩍 소쩍 소쩍.

까치 혓바닥만 하던 연두색 감잎이 아기 손바닥만큼 자랄 즈음 연화 아가씨 뒤안은 박새, 멧비둘기, 소쩍새 등 온갖 새들 노랫소리로 가득 찼단다. 연화 아가씨 집 앞 다랑논에선 개구리까지 개굴 개굴 장단 맞춰 울어대기 시작했지. 그야말로 봄이 무르익을 대로 무르익어가고 있었어. 하지만 무르익고 있는 건 봄뿐만이 아니었단다. 흑운, 백운 형제의 갈등도 무르익어가고 있었지 뭐야.

"흥, 백운 네 놈이 형을 무시하고 매번 그렇게 맞선다 이거지? 하지만 이번엔 어림없을 거다."
흑운은 아침부터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집을 나섰어. 지게도 메지 않은 채 홀가분한 맨몸으로 나서는 걸 보니 나무를 하러 가는 것 같지도 않았지. 그런데도 흑운의 발길은 산을 향하고 있었지.

사실 흑운의 머릿속엔 무서운 생각이 자리 잡고 있었던 거야. 그동안 매번 자신에게 맞서는 동생이 미워 늘상 싸우긴 했어도 백운을 없애버려야겠단 생각까지는 하지 않았어. 그런데 이번엔 달랐지.

연화 아가씨를 향한 마음이 커지면 커질수록 아가씨 주변을 맴도는 백운이 너무도 거슬렸지. 행여 연화 아가씨의 환한 미소가 조금이라도 백운을 향하면 질투가 나서 미칠 것만 같았단다. 그래서 흑운은 동생에게 해서는 안 될 위험한 해코지를 하기로 결심한 거야.

"그게 어디 있더라? 엊그제까지만 해도 분명 이 언저리에 있었는데……."
산등성이 중간쯤 오른 흑운은 온몸이 땀에 흠뻑 젖은 채로 무언가를 열심히 찾고 있었어. 따뜻해진 날씨 덕에 수풀은 날로 우거져 며칠 전 보았던 것도 넝쿨째 묻히기 마련이었지. 한참 수풀을 뒤지던 흑운은 드디어 허리를 펴고 소리치듯 말했어.

"찾았다!"
흑운의 눈길이 머문 곳엔 보라색 종 같은 작은 꽃들을 매달고 있는 야생화들이 한 무더기 있었단다. 여리고 보들보들해 보이는 잎 때문에 나물을 해 먹어도 될 것 같았지. 하지만 그건 평범해 보이는 모습과는 달리 맹독을 가진 산야초였어. 바로 광대작약이었지.<계속>

 


주민들의 입으로 전해지는 설화

벼락수골은 지금의 강진군 강진읍 동성리 목화마을 뒤쪽을 가리키는 이름이야. 싸움질만 하다가 하늘에서 쫓겨난 형제들은 땅 위에 내려와서도 잘못을 뉘우치지 않고 계속 싸웠어. 결국 벌로 벼락을 맞았다는 전설이 깃든 곳이지. 예나 지금이나 하늘에 산다는 신선이나 선녀 등이 등장하는 이야기는 늘 우리 귀를 솔깃하게 만드는 매력이 있어. 더군다나 아름다운 아가씨까지 등장하면 더욱 그렇지?

옛날부터 사람들 입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를 크게 아울러서 설화(說話 신화·전설 등을 줄거리로 사실처럼 꾸민 옛이야기)라고 해. 설화는 다시 그 내용이나 특징에 따라 신화, 전설, 민담으로 나눌 수 있단다. 신들의 이야기나 나라를 세운 신적인 인물 등의 이야기를 다루면 신화라고 해. 또 평범한 이들을 주인공으로 삼아 간결하고 반복적인 구성 속에 재미 있는 내용으로 행복하게 마무리 지으면 민담이고 하지.

그 중에서 전설은 나무나, 꽃, 바위, 연못 등 증거물을 남기는 이야기야.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백일홍 아가씨와 이무기 이야기, 또는 제주도의 지형(地形 땅의 생긴 모양이나 형태)과 관련된 설문대 할망 이야기가 전설인 거야. 이야기가 증거물을 남겼다기보다는 특이한 바위나 나무 등을 보며 우리 조상들이 상상력을 발휘하여 이야기를 남겼다는 것이 더 맞는 말일지도 모르겠구나.

어쨌든 벼락수골 전설도 전설이니만큼 증거물을 남겼지. 그 전설의 증거물 중 하나는 큰물이 질 때마다 반복되게 내려오는 토사야. 산에서 내려온 토사가 마을 앞에 기름진 땅을 만든 덕분인지 목화마을 앞은 예로부터 미나리꽝이 넓게 펼쳐져 있었어. 하지만 지금은 새로 난 도로로 그 미나리꽝의 모습도 많이 바뀌었더구나.

그리고 또 하나는 여제단이라는 제각이야. 한갓 짐승의 죽음도 위로해주고자 했던 강진 목화마을 사람들의 따뜻한 마음이 제각을 만들고 제사를 지내게 한 거지. 불과 50여 년 전만 해도 여제단에서는 짐승들을 위한 제사를 지냈대. 하지만 지금은 모두 무너지고 그 흔적도 대숲에 파묻혀 버렸어. 하지만 목화마을 어르신들은 아직도 여제단에서 제사 지내던 옛 추억을 가끔 회상하고 있더라고. 오랜 세월의 풍파 속에 여제단은 사라져 버렸지만 그래도 벼락수골 전설이 우리에게 전하려는 진짜 속말이 무엇인지는 꼭 되새겼으면 좋겠어.

수많은 세월 동안 인간은 많은 전쟁을 일으키고 많은 생명을 희생시켜 왔어. 한 생명을 탄생시키고 기르기 위해서는 오랜 인내와 정성이 필요하지만 안타깝게도 요즘엔 그러한 생명을 너무도 쉽고 잔인하게 희생시키는 경우가 많아. 당장에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만 봐도 얼마나 많은 생명들이 안타깝게 희생되고 있니? 또 무심한 실수로 낸 산불은 얼마나 많은 산짐승들의 생명을 앗아갔나 생각해봐. 이젠 어떤 이유로든 그런 끔찍한 일들은 다시는 일어나지 않길 바랄 뿐이야. 아주 작은 생명이라도 존중하고 함께 잘 살기 위해서 여제단을 짓고 짐승들의 영혼까지 위로했던 선조들의 마음을 배워보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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