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승들의 영혼까지 위로했던 선조들의 마음
짐승들의 영혼까지 위로했던 선조들의 마음
  • 강진신문
  • 승인 2023.09.29 0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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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동네 옛 이야기 - 동성리 사의재길(3)] 벼락수골 이야기(Ⅰ)

'우리 동네 옛이야기'는 강진의 숨겨진 역사와 문화 이야기를 동화로 묶은 우리 강진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지난해 11월 네 번째 책, '우리동네 옛 이야기-동성리 사의재길'을 출간했다. 이번 책은 장미연·김옥애·강현옥 글, 김충호 그림으로 만들어졌다. 강진 사람이 모여서 함께 쓰고 그린 작품집이라 그 울림이 더 크고 우리들만의 소중한 공감대가 있다.
책을 통해 강진은 어떤 곳인지를 어렴풋하게 밝히는 마음속의 '등' 하나가 '반짝'하고 켜지길 기대해본다./편집자 주


 

목화마을 앞 미나리꽝

 


 땅 위는 한 해가 저물어 간다는 동지(양력 12월 22일 무렵)라 나무며 돌이며 모두 얼어붙고 있던 때야. 하지만 하늘나라는 늘 봄날이라 복숭아꽃이 흐드러지게 핀 정원엔 나비들이 팔랑팔랑 날갯짓을 하며 여기저기 날아다녔어. 때마침 하늘 정원에는 신선들과 하늘나라 관리들이 모여 한참 골머리를 싸매고 있었지.

"어허! 내 신선이 되어 이곳 하늘나라에 산 지 수백 년이 넘었지만 저리도 망나니 같은 이들은 처음 보았습니다." 항상 푸른 도포를 입어서 청풍 도사라 불리는 신선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문을 텄어.

"그러게나 말입니다. 더군다나 신선이나 된다는 이들이 욕심은 저 아래 땅에 사는 흔한 욕심쟁이보다 몇 곱절은 더 하니……. 쯧! 쯧!"

"하늘나라에 사는 이들로서 모범을 보이지는 못할망정 허구헌날 싸움질이라니……." 이번엔 눈썹과 수염이 온통 새하얀 신선인 설백 도사가 말을 받았어.

"그들이 형제라는데 더 큰 문제가 있는 거지요." 언제 왔는지 소리 없이 다가온 백매화가 고운 이마를 찡그리며 한마디 거들었어.

"어허! 언제 오시었소? 그래 상제께서도 이번엔 그냥 넘어가지 않으실 것 같은데 백매화님이 보시기엔 어떤가요?"

"청풍님 말씀대로 옥황상제께서도 이번엔 큰 결단을 내리실 것 같습니다. 그들의 욕심이 지나친 건 알고 있었지만 하늘 도화원의 복숭아(천도라고도 하는 하늘의 복숭아나무에 열린다는 신비스러운 열매로 신선들이 먹는다고 함)까지 죄다 따먹어버리니 상제님도 두고 보실 수만은 없으시겠지요."

하늘나라 신선들이 모여서 이렇게 얘기를 나누는 건 다름 아닌 형제이면서도 죽어라 싸움질만 하는 두 신선 때문이었어. 게다가 둘은 누가 더 하다, 덜 하다 할 수 없을 정도로 욕심도 지나쳐 하늘 물건은 죄다 쓸어 담아 하늘나라의 골칫거리들이었던 거야. 둘은 형제이면서도 사소한 일 하나도 양보하는 법이 없었어. 그래서 하늘나라는 둘의 싸움으로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었던 거야. 그래도 옥황상제는 그런 두 형제를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려주고 있었어.

 

하지만 날이 갈수록 형제의 싸움은 더해지면 더해졌지 수그러들 기미가 보이질 않는 거야. 욕심도 하루하루 더해만 가고. 결국 보다 못한 신선들은 회의를 열고 형제를 벌해 달라 탄원을 올리게 되었단다.

"상제님, 이제 더 이상 두고 볼 수만은 없습니다."

"네, 그렇습니다. 형제의 싸움으로 하늘나라 기강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이제 그만 결단을 내려주십시오." 신선들은 입을 모아 형제를 벌하여 줄 것을 청했단다. 거듭 올라오는 신선들의 탄원에 옥황상제라 하더라도 더 이상 어쩔 수 없었지. 결국 형제를 불러 벌을 내리게 되었어.

"형제는 듣거라! 너희는 하늘의 사람으로서 형제끼리 더 우애 있게 지내고 모든 일에 모범을 보여야 하거늘 싸움만 일삼아 주변에 근심이 차고 넘치게 하였다. 또한 욕심이 지나쳐 이미 하늘의 백성들에게 큰 피해를 주고 있으니 이제 내 인내심도 바닥이 났구나. 지금부터 너희를 저 아래 땅 위로 내칠 터이니 그곳에 내려가서는 부디 잘못을 뉘우치길 바란다."

형제는 억울하다고 호소했지만 옥황상제의 결단은 단호했단다. 결국 형제는 하루아침에 세상으로 내쳐지게 되었어. 그곳이 바로 목화마을(강진군 강진읍 동성리 목화마을)이었단다.

휘이잉. 휘이잉. 서산으로 해가 걸리기 시작하자 동짓달 바람이 더욱 을씨년스럽게 불어 닥쳤지. 입은 옷이라고는 하늘에서 내쳐질 때 걸치고 있던 얇은 도포(예전에 통상예복으로 입던 남자의 겉옷. 소매가 넓고 등 뒤에는 딴 폭을 댄다.)가 전부인지라 찬바람이 뼛속까지 파고들었어. 하늘나라에서 아무 걱정 없이 살던 형제는 갑작스레 맞닥뜨린 추위와 배고픔에 엉엉 울고만 싶었단다. 어디로 가서 신세를 져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지. 그런데 때마침 물동이를 이고 형제 앞을 지나가는 아낙이 하나 있었어. 형제는 얼른 아낙을 불러 세웠단다.

"잠시 하나만 좀 물읍시다. 이 근처에 혹시 나그네가 쉬어갈 만한 집이 있습니까?"

"글쎄요. 요즘같이 입에 풀칠하기도 힘든 때 나그네에게 방을 내줄 집이 있을까요? 혹시 연화네라면 또 모르겠네요. 이 골짜기 끝까지 올라가면 사립 앞에 큰 무궁화나무가 있는 집이니 한번 찾아가 보시든지요."

아낙은 그렇게 말해주고 잰걸음으로 쌩하니 가버렸어. 형제는 하루아침에 초라한 나그네 신세가 된 것이 기가 막혀서 싸움질할 생각도 안 났어.

"일단 한번 가보자." 형이 먼저 발걸음을 뗐어. 동생도 묵묵히 뒤를 따랐어. 적어도 그때만큼은 둘 다 조금이라도 뉘우치는 것 같았어. 하늘에서도 이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단다.

동네 아낙이 가르쳐준 대로 오솔길을 따라 올라가니 외딴집이 한 채 있었어. 야트막한 흙담 사이로 사립문까지 활짝 열려 있어 마당이 환히 보이는 집이었지. 그리고 그 옆으로는 사람 키를 훌쩍 넘는 커다란 무궁화나무가 사천왕수처럼 문 앞을 지키고 있었어. 마침 마당 가운데에서 뒷모습만 보이는 댕기 머리 아가씨가 산새들에게 모이를 주고 있었단다.

"흠! 흠!" 두 사람은 헛기침을 하고 사립 안으로 들어섰어. 쫓겨난 신세이긴 하지만 그래도 하늘에서 온 사람들이라고 예의를 차리느라 그런 거야. 두 사람의 헛기침 소리에 놀란 산새들이 푸드덕거리며 하늘로 날아올랐어.

"어머나! 얘들아, 괜찮아. 마저 먹고 가렴." 아가씨는 뒤돌아볼 생각도 않고 아쉬운 듯 날아가는 새들만 바라보았지. 새들은 멀리 날아가지도 않고 지붕 위에 내려앉았어. 아마도 아가씨와 퍽 친한 듯 했지.

"실례합니다." 아우가 머뭇거리며 말을 걸었어. 신선 체면이 말이 아니었지. 아가씨는 그때서야 천천히 돌아섰어. 순간, 형제는 입이 딱 벌어졌단다. 연화(蓮花-연꽃). 이름대로 너무 깨끗하고 아름다운 아가씨였거든. 아가씨는 백련처럼 하얀 얼굴에 미소를 띠고 물었어.

"무슨 일로 오셨는지요?"

"지나는 나그네인데 잠시 머물 곳이 없어 염치불고 하고 왔는데……."

"날도 저물고 해서……." 형제는 구구절절 변명을 늘어놓으며 부탁했어. 그래도 부끄러움은 알아서 차마 하늘나라에서 내쳐진 거란 말은 할 수가 없었지.

한편으론 혹시라도 거절하면 어떡하나 걱정도 앞섰단다. 하지만 형제의 걱정과는 달리 연화 아가씨는 여전히 웃는 얼굴로 대답했지.

"곤경에 처하신 분들을 모른 체 해서야 되겠습니까? 저희 집이 좁고 누추해서 머무실 곳으로 마땅치는 않지만 그래도 하늘을 지붕 삼는 것보다는 나을 테니 며칠 쉬어 가시지요."

아가씨의 한 마디 한 마디는 맑은 바람처럼 시원하고 깨끗한 물처럼 맑았단다. 그때 안방 문이 열리며 마른기침 소리가 새어 나왔단다.

"연화야, 손님이 왔니?"

사람 얼굴은 보이지 않고 문틈 새로 깡마른 손등만 보였어.

"네, 어머니! 주무실 곳이 마땅치 않은 나그네들께서 오셨어요."

"저런……. 다 늦은 해거름에 산을 넘다가 호랑이라도 만나면 어쩌시려고? 누추하지만 우리 집이라도 잘 곳을 정하게 되었으니 정말 다행이구나." 연화 아가씨의 늙은 어머니도 아가씨 못잖게 인정이 넘쳤단다.<계속>

주민들의 입으로 전해지는 설화
벼락수골은 지금의 강진군 강진읍 동성리 목화마을 뒤쪽을 가리키는 이름이야. 싸움질만 하다가 하늘에서 쫓겨난 형제들은 땅 위에 내려와서도 잘못을 뉘우치지 않고 계속 싸웠어. 결국 벌로 벼락을 맞았다는 전설이 깃든 곳이지. 예나 지금이나 하늘에 산다는 신선이나 선녀 등이 등장하는 이야기는 늘 우리 귀를 솔깃하게 만드는 매력이 있어. 더군다나 아름다운 아가씨까지 등장하면 더욱 그렇지?

옛날부터 사람들 입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를 크게 아울러서 설화(說話 신화·전설 등을 줄거리로 사실처럼 꾸민 옛이야기)라고 해. 설화는 다시 그 내용이나 특징에 따라 신화, 전설, 민담으로 나눌 수 있단다.

신들의 이야기나 나라를 세운 신적인 인물 등의 이야기를 다루면 신화라고 해. 또 평범한 이들을 주인공으로 삼아 간결하고 반복적인 구성 속에 재미 있는 내용으로 행복하게 마무리 지으면 민담이고 하지. 그 중에서 전설은 나무나, 꽃, 바위, 연못 등 증거물을 남기는 이야기야.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백일홍 아가씨와 이무기 이야기, 또는 제주도의 지형(地形 땅의 생긴 모양이나 형태)과 관련된 설문대 할망 이야기가 전설인 거야. 이야기가 증거물을 남겼다기보다는 특이한 바위나 나무 등을 보며 우리 조상들이 상상력을 발휘하여 이야기를 남겼다는 것이 더 맞는 말일지도 모르겠구나.

어쨌든 벼락수골 전설도 전설이니만큼 증거물을 남겼지. 그 전설의 증거물 중 하나는 큰물이 질 때마다 반복되게 내려오는 토사야. 산에서 내려온 토사가 마을 앞에 기름진 땅을 만든 덕분인지 목화마을 앞은 예로부터 미나리꽝이 넓게 펼쳐져 있었어. 하지만 지금은 새로 난 도로로 그 미나리꽝의 모습도 많이 바뀌었더구나.

그리고 또 하나는 여제단이라는 제각이야. 한갓 짐승의 죽음도 위로해주고자 했던 강진 목화마을 사람들의 따뜻한 마음이 제각을 만들고 제사를 지내게 한 거지. 불과 50여 년 전만 해도 여제단에서는 짐승들을 위한 제사를 지냈대. 하지만 지금은 모두 무너지고 그 흔적도 대숲에 파묻혀 버렸어. 하지만 목화마을 어르신들은 아직도 여제단에서 제사 지내던 옛 추억을 가끔 회상하고 있더라고. 오랜 세월의 풍파 속에 여제단은 사라져 버렸지만 그래도 벼락수골 전설이 우리에게 전하려는 진짜 속말이 무엇인지는 꼭 되새겼으면 좋겠어.

수많은 세월 동안 인간은 많은 전쟁을 일으키고 많은 생명을 희생시켜 왔어. 한 생명을 탄생시키고 기르기 위해서는 오랜 인내와 정성이 필요하지만 안타깝게도 요즘엔 그러한 생명을 너무도 쉽고 잔인하게 희생시키는 경우가 많아. 당장에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만 봐도 얼마나 많은 생명들이 안타깝게 희생되고 있니? 또 무심한 실수로 낸 산불은 얼마나 많은 산짐승들의 생명을 앗아갔나 생각해봐. 이젠 어떤 이유로든 그런 끔찍한 일들은 다시는 일어나지 않길 바랄 뿐이야. 아주 작은 생명이라도 존중하고 함께 잘 살기 위해서 여제단을 짓고 짐승들의 영혼까지 위로했던 선조들의 마음을 배워보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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