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로] 선비 닮은 듯 열두 폭 치마인 듯
[다산로] 선비 닮은 듯 열두 폭 치마인 듯
  • 김재완 _ 시인
  • 승인 2023.09.18 18:4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김재완 _ 시인

그날따라 매서운 바람이 아랫목에 덮여있을 쌀밥을 그립게 하더라. 꽁꽁 얼어붙은 손아귀에 들려있는 책가방이 아니라면 난 여지없는 동자승이다. 선친의 잦은 전근은 적당한 하숙집을 찾지 못해 급기야 석문산에 자리한 수도암 암자에 떨궈 놓고 가족들은 강진읍내로 떠났다.

지금에서야 무릇 낭만이겠으나 그때는 개 폼 잡는다고 빡빡이 고시생 흉내를 내는 치기로 웃자라는 잡초였다. 석문산 합장산은 그렇게 칼바람과 소년의 성장을 동시에 안겨준 아련한 수채화다.

새초롬하고 다감한 여학생의 뒷모습에 찰나의 설렘도 있었고 함께해 준 친구의 무심한 듯 따뜻한 발자국 소리에 지금까지 그와의 우정은 여전한데 석문산 구름다리는 또 다른 뿌듯함으로 내 고향 도암에 서있게 한다.

이쯤에서 무거운 카메라 대신 스마트 폰 화질을 믿고 선비바위, 구름다리(출렁다리) 소금강이라 대접 받던 석문산의 출중한 전경을 담는다. 그리고 비록 도포자락에 떨어진 막걸리는 없으나 거나하게 전사에 취해 노래한다.

석문산 구름다리
시시비비 못 가리고 가까이서 서로 눈치 보던 '합장산' '석문산'이 기어이 손을 잡았구나
그 옛날 둘은 기상은 있었으되 메아리가 없었고 위엄은 보였으나 누르지를 못했다
세월을 무심하게 흘려보낸 잠잠했던 계곡물은 모난 바위 나무라듯 물살 뿌려 깨우고 눈물 같은 안개 이슬이 점점이 흩어져 칙칙하게 다리 난간에 내려와 앉는다
칠십여 년 전 통곡의 무덤이 된 핏빛 골짜기 한없이 가까웠던 내 이웃 얼떨결에 끌려와 하얀 무명옷 빨갛게 내동댕이 처진 절규
손잡은 두 봉이 그래도 마음을 열고 땅을 치던 민초의 뜻 헤아리나 보다
원통의 한 가슴 쓰려 밤 비둘기 울음으로 살아나 삼백육십오일 어지러이 날아가고 날아들고
흔들어 대며 드러눕던 억새풀의 흐느낌도 다 묻어가고 장승같은 바위에 박혀 삼켜지지 않은 슬픈 기억도
계곡 물속에 잠겨있는 사금파리같이 시린 아픔도 잊고 잠들어 봄마다 이 산 저 산에서 예쁜 풀꽃으로라도 피어나
차창 밖 환한 꽃 웃음으로 길손 맞이하련다.(석문산 계곡은 6.25 사변의 동족상잔이 서린 곳이다)     

찌그러진 양재기 속에 아른거리는 슬픈 눈동자는 통곡으로 가신님 들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건네고 그래도 당신들을 기억한다. 토닥토닥 거문고를 탄다. 어른들에게 들었던 석문산의 쓰린 서사는 그렇게 오늘은 나에게 아름다운 작별이다.

머잖아 추석이다. '나훈아'의 '고향역'의 가사를 개사해서 부르곤 했던 기타리스트 친구가 문득 그리워지는 음력 팔월이다. 청주와 사과 바구니를 들고 버스를 타면 석문산이 반갑게 맞아 줄 것 같은 마음에 본가에 가는 책무를 잊은 채 나의 시선은 선비바위에 걸쳐 있었다.

그런데 올여름 강진군의 물놀이 축제가 석문산에서도 성대하게 치러졌다는 소식을 듣고 무척이나 반가웠다. 군동면에서 출발해서 강진 갈대밭 다산초당 백련사를 거쳐 석문산 도암 농협을 마침표로 5시간을 걸어 신작로의 운치도 맛보고 다양한 볼거리에 문화 쥽쥽(이것저것 주워 담는다는 요즘 신어)을 했다는 블로그의 멋짐에 응원을 보내는 도암 사람이 나라니...고향은 뜨겁고 당기는 곳이다.

이렇듯 서사가 있는 문화는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도암 초등학교, 중학교 교가에는 석문산이 자리하고 갈재맥도 펼쳐져 있고 우리 모두는 석문산을 병풍삼아 갈재맥 처럼 단단하고 심지 곧은 기상을 키운다. 금강산은 계절에 따라 명명을 달리하는데 우리 석문산도 역시 봄에 핀 진달래와 선비바위, 골짜기에서 불어오는 냉동바람, 가을에 갈아입은 열두 폭 치맛자락의 우아한 풍경, 추운 겨울에도 온기를 내어주는 엄마 품속 같은 석문산의 팔색조 매력도 금강산의 또 다른 이름이다.

서사는 이어짐이고 서사는 묘미와 성장을 선사한다. 나의 넋두리 시 한편에서 우리 고향 사람들, 여행자들이 한 번 더 상념에 젖은 멈춤을 그리고 구름다리에서 승화된 몸짓으로 희노애락의 시간을 만나길 바란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