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강진향교, 송하장 어르신의 가르침
역사속 강진향교, 송하장 어르신의 가르침
  • 강진신문
  • 승인 2023.09.07 0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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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동네 옛 이야기 - 동성리 사의재길(2)]
강진향교와 송하장(Ⅱ)

'우리 동네 옛이야기'는 강진의 숨겨진 역사와 문화 이야기를 동화로 묶은 우리 강진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지난해 11월 네 번째 책, '우리동네 옛 이야기-동성리 사의재길'을 출간했다. 이번 책은 장미연·김옥애·강현옥 글, 김충호 그림으로 만들어졌다.
강진 사람이 모여서 함께 쓰고 그린 작품집이라 그 울림이 더 크고 우리들만의 소중한 공감대가 있다. 책을 통해 강진은 어떤 곳인지를 어렴풋하게 밝히는 마음속의 '등' 하나가 '반짝'하고 켜지길 기대해본다./편집자 주

 

강진향교

 


"동학도를 역적으로 몰기 이전에 그들이 왜 민란을 일으켰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지 않겠느냐? 물론 그들의 방법이 다소 격하여 관을 습격하고 민가를 불 지르고 한 것은 분명 잘못된 행동이다. 하지만 삶의 고달픔과 배고픔에 어쩔 수 없이 가담한 이들까지 일일이 추포하여 죽인다면 남을 백성이 과연 몇이나 되겠느냐?"

"그럼 스승님께서는 잘못이 있는데도 인정으로 봐줘야 한다는 겁니까?"

"잘못을 인정으로 무조건 봐주자는 것과는 다른 말이니라. 동학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가담하였다면 그 잘못의 가볍고 무거움에 맞게 벌을 주거나 용서해줘야지 목숨까지 앗는 무서운 형벌을 내려서야 되겠느냐? 나라님(임금님)께서 도 이 점은 충분히 헤아려 주시리라고 본다. 그러니 너무 걱정들 말거라. 선비라면 주변의 어려움도 살피고 도울 수 있는 게 있다면 도와야 하지 않겠느냐? 책상머리에서 옛 경전의 글월만 읽고 있다면 어찌 진정한 선비라 할 수 있겠느냐?"

어르신의 목소리는 낮지만 그만큼 묵직한 힘이 실려 있었어. 제자들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지.

소쩍 소쩍 소쩍. 애달픈 소쩍새 울음소리가 명륜당(향교의 전각 중 하나로 교유가 유생들에게 강론을 펼치던 곳) 앞마당에 가득 들어찼어.

유생들도 모두 돌아가고 어스름한 산그늘이 명륜당 대청마루 깊숙이 늘어지는데도 어르신은 일어서질 않으셨어. 시간의 문을 잘못 들어온 나는 갈 곳이 없어 가만히 그 곁을 지키고 있었지.

잠시 후 어르신은 심부름하는 아이를 시켜서 깨끗한 흰 종이를 준비하게 하고 내겐 먹을 갈게 하셨단다. 그리고 눈을 감고 한참 동안 생각에 잠기셨어. 전쟁터에 나가는 장수처럼 비장한 모습이었지. 그리고 잠시 후 눈을 뜨시더니 종이 위에 무언가를 한참 동안 쓰셨어. 난 다리가 저렸지만 차마 말 한마디 걸 수가 없었단다.

"흠, 다 되었다." 어르신은 한참 후에야 붓을 놓으며 길게 날숨을 내쉬었어.
"다 쓰셨어요? 뭐라고 쓰신 겁니까?"
"궁금하냐?"
"네"

"동학도의 처벌에 관해 인정을 베풀어 달라고 썼느니라."
나는 말없이 어르신을 바라보기만 했어.
"왜 너도 법대로 시시비비를 가려야 한다고 말하려는 게냐?"
"아니요, 그런 건 아니지만……."

 

난 그 뒤에 '어르신이 걱정이 되어서 그래요.'라는 말은 그냥 목구멍으로 꿀꺽 삼켰단다. 고을 백성들을 걱정하는 어르신의 마음이 이미 다 정해져 있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야.
"어찌 세상일을 법으로만 처리할 수 있겠느냐? 특히 사람의 목숨이 달린 문제라면 법을 집행함에 있어서도 한 번쯤은 인정을 베풀어야 하지 않겠느냐?"
"그건 그렇지요."

"그들 중엔 지방관의 수탈을 못 이겨 궁지에 몰리듯 가담한 이들도 많단다. 그들 중엔 늙은 어머니를 홀로 두고 잠깐 가담했다가 잡힌 아들도 있지. 그런 이의 목숨까지 앗는다는 건 너무 잔인한 일이지 않겠느냐?"
어르신의 두 눈은 촉촉이 젖어 있었어. 나를 호통 치실 때의 모습과는 다른 모습이었지.

"저 들판을 보거라."
어르신은 자리에서 일어나 나를 옆으로 부르셨지. 어르신이 가리키는 곳엔 이제 막 어둠이 내려앉은 들판이 펼쳐져 있었어. 들판은 넘실대는 보리들로 연초록 물결을 이루고 있었지.

"저 푸른 들판의 곡식들이 참 아름답지 않느냐? 가담한 이들 중엔 농사짓는 이들이 태반인데 그들을 과하게 벌한다면 저 들판에 곡식은 누가 거두어들인단 말이냐? 처벌보다는 계도(남을 깨치어 이끌어 줌)를 해서 그들도 다시 생업을 이어가도록 해야 하지 않겠느냐? 법도 중요하나 그 바탕엔 항상 인(仁. 유교의 근본이념으로 인간에 대한 사랑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이 있어야 하느니라."

"어르신의 뜻을 후세 사람들도 꼭 알아줬으면 좋겠네요."
난 속으로 '그 후세 사람 중 한 명은 저예요. 제가 꼭 알릴게요.'라고 말했어. 내 속마음을 알 리 없는 어르신은 그저 부드러운 미소로 바라보기만 하셨지.
"먹을 더 갈거라."
"다 쓰신 게 아니었나요?"

"동학난 이후 강진군을 영암군에 복속시키려 하고 있단다. 동학난으로 동헌과 병영성이 파손되었다고는 하나, 강진은 예로부터 제주와 연결되는 주요 거점이었는데 이만한 일로 강진을 영암군에 복속시켜서야 되겠느냐? 그건 이곳의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서 조정에서 성급하게 내린 결정이니 분명한 이유를 대서 반대하고 강진을 지켜내야 하지 않겠느냐?"

그때까지만 해도 난 어려서 지역의 역사는 전혀 몰랐어. 강진군이 사라질 뻔한 위기가 있었다는 것도 말이야. 아마도 어르신이 앞장서서 그걸 막으셨나 봐. 무언가 대단한 역사의 한 부분에 내가 한 몫을 보태는 것 같아 나도 모르게 힘이 났어.

그래서 부지런히 먹을 갈았지. 그런데 이걸 어쩌면 좋아. 먹을 갈수록 자꾸만 졸음이 몰려오는 거야. 나도 모르게 꾸벅꾸벅 졸기 시작하는데 어렴풋이 조는 나를 깨우는 목소리가 들렸어.

"졸리면 들어가 자거라."
"아니요, 괜찮습니다. 저 안 잤습니다."

난 겨우 대답했어. 역사적인 순간에 졸다니 내 자신이 너무 한심한 거야. 하지만 한심한 건 마음뿐이고 눈꺼풀은 여전히 떠지질 않았지.

"졸리면 들어가 자거라."
"아니요. 저 안 잤습니다."
겨우 또 대답하는데,

"하하하하하"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왔어. 그리고 이마에 딱밤 한 대가 강하게 날아왔지.
"요 녀석! 배포 한번 좋구나. 명륜당 대청마루에서 보란 듯이 대자로 뻗어 자고 있었던 녀석이 '안 잤습니다'라니 변명이 참 시원하구나."
"하하하하"

눈을 떠 보니 어느새 난 현재로 돌아와 있고 담임선생님과 반 아이들이 내 옆을 둘러 싸고 있었어.

"아! 선생님!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난 현실로 돌아온 게 너무 다행이라 선생님께 연신 고개를 숙여 감사드렸어. 선생님과 아이들은 영문을 모르니 그런 나를 보고 아직 잠이 덜 깬 거라고 웃어댔어. 하지만 난 꿈을 꾼 게 아니었어. 정말이야. 그날 내 오른손 등에 틘 먹물이 점이 되어. 어른이 된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거든. 에이, 그런 게 어딨냐고? 그런 게 있어. 끝까지 들어보렴. 아직 이야기가 끝난 게 아니니까.

그날 깨어난 명륜당 대청마루에서 해설사 선생님의 설명을 통해 그 선생님을 다시 만날 수 있었어. 선생님의 호가 송하(松下-'소나무 아래'라는 뜻으로 강진 향교 교유셨던 오한규 선생께서 직접 지은 자신의 호이다.)이고 향교 교유(조선시대 지방 향교의 선생)와 남강서원 도유사(향교, 서원 등에서 사무를 맡아보던 이들 중 최고 책임자)를 지내셨다는 것도 알게 되었어.

그리고 상소문에 관한 이야기도 들었지. 집에 와서도 그 여운은 가시질 않아 어머니께 신기한 경험에 관한 이야기를 늘어놓았어. 어머니라면 분명히 내 얘기를 믿어 주실 것 같았거든. 그런데 어머니 대답을 듣고 난 더 놀랐단다.

"네가 송하장 할아버지를 어찌 아느냐?"
"오늘 향교에서 그분에 대해 들었어요. 그리고 사실은 저 그 분을 직접 뵙기도 했어요."
"오호! 그래? 혹시 그분 책이라도 보았니?"
"그분 책이라뇨?"

어머니는 빙그레 웃으시더니 서재에서 오래되어 보이는 책 한 권을 들고 나오셨어. 한문으로 쓰여져서 제목은 잘 알 수 없었지만 왠지 모르게 대단한 기운이 느껴졌지.

"송하유고(松下遺稿. 송하 오한규 선생이 남긴 시를 비롯해 문하생들의 시 등이 담김. 특히 동학혁명에 관한 당시 상황과 동학도들의 처리 문제에 인정을 베풀 것을 간하는 상소와 강진을 영암에 복속시키라는 처분에 항소하는 글이 담겨 있어 역사적 가치가 높다.)라는 책이야. 방금 네가 말한 송하장 할아버지께서 남기신 글이란다."

"이게 왜 우리 집에 있어요?"
난 놀라서 물었어.
"네가 송하 오한규 어르신의 후손이기 때문이지. 네가 아주 어릴 적 집안 어른들께서 가끔 송하장 할아버지 얘기를 들려주곤 했는데……. "

어머니 말에 난 벌린 입을 다물 수가 없었어.
그해 사월 난 어른들을 따라 처음으로 집안 시제에 참석했어. 강진군 도암면 석문리 양지바른 곳에서 그 어르신을 다시 만났단다. 송하장 할아버지 묘비 앞에서 난 조용히 속삭였어.
"할아버지의 높은 뜻 꼭 기억하고 저도 이어갈게요.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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