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고찰, 차향으로 전해지다
천년고찰, 차향으로 전해지다
  • 김철 기자
  • 승인 2023.09.07 0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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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강진차 고려시대를 알리다(2)

 

강진차는 다산선생이 강진에서 생활하면서 중흥기를 맞았다고 알려지고 있다. 하지만 이보다 훨씬 앞선 고려시대에도 각 사찰을 중심으로 널리 차를 마시고 있었다는 말들이 있다. 문헌과 각종 유물을 통해 고려시대 강진차를 하나씩 되짚어보고 역사적 의미를 찾아본다. 편집자주/

성전면 월남사 수많은 기록...고려초 다연 사용
월남사는 『新增東國輿地勝覽』에 眞覺國師 혜심(慧諶, 1178~1234)이 창건했다고 되어 있으나, 최근 월남사지 발굴조사에서 백제시대의 연화문수막새를 비롯하여 중국 오대(五代)의 청자와 북송대의 건요(建窯) 다완, 고려초기에 생산된 청자 해무리굽완 등이 출토되면서 백제시대에 창건되어 고려 초에도 운영되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아졌다.

혜심이 월남사를 창건했다는 것은 寺格이 높지 않았거나 폐사 위기에 있었던 월남사를 혜심이 중창함으로써 유명해졌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혜심이 월남사를 중창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최우(崔瑀, ?~1249)와 그의 아들 최항(崔沆, ?~1257) 등 무인집권 세력이라는 정치적인 후원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최우는 혜심이 주석해 있었던 송광사에 최항을 출가시켰고, 당시 僧名은 萬全이었다. 그래서 최항은 혜심이 입적한 이후 스승을 추모하기 위해 이규보로 하여금 비문을 짓게 하고, 「眞覺國師碑文」를 월남사에 설치한 것이다. 康宗과 최우는 때마다 차와 향을 보낼 정도로 혜심을 극진히 대우했다.

無衣子로 불리었던 진각국사 혜심은 많은 禪詩를 남겼는데, 그 중에 「妙高臺上作(높은 樓臺 위에서 짓다)」라는 시가 있다.

산마루의 구름은 걷히지 않았는데,  
시냇물은 왜 그리도 바삐 흐르나.   
소나무 아래에서 솔방울 따서       
차 달이니 맛이 더욱 향기롭다.    

소나무 밑에서 차를 끓일 때에 근처에 떨어진 솔방울을 주어서 茶를 끓이는 장면은 더러 다른 茶詩에서도 소개되고 있는데, 이것은 松香을 음미하는 멋도 있겠지만, 일부러 소란을 피우면서 茶를 끓이는 것을 경계하는 儉朴性을 강조한 것이다.

「차와 呈解問을 보내온 것에 답하여」라는 시에는
밤새도록 참선으로 피곤해진 밤에
차 달이며 무궁한 은혜를 느끼네.
한잔 차로 어두운 마음 물리치니
뼈에 사무치는 청한(淸寒) 모든 시름 스러지네.
라 하여, 오랜시간 좌선으로 인한 피로와 잠을 해소하기 위해 선물받은 차를 끓여 마시면서 세상의 온갖 시름과 혼미함을 걷어낼 수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또 「인월대(隣月臺)」라는 시는
바위산 높고 높아 깊이를 알 수 없네,
그 위에 높은 누각 하늘 끝에 닿았네.
북두칠성으로 은하수 길어다 차 달이는 밤,
차 끓이는 연기가 달의 계수나무를 감싸네.
라 했는데, 이 시에서 높고 높은 바위산은 월출산을 가리킨다. 늦은 밤 찻물을 끓이면서 올려다본 하늘의 은하수와 월출산 바위 등성이 풍경을 높은 누각에 비유하였다.

월남사지 발굴조사에서는 고려 초 강진 대구면 청자요지에서 생산한 청자 해무리굽완들이 출토되었다. 대구면에서 생산한 청자 茶具가 인근 사찰에서 소비되고 있었던 상황을 말해주는 자료이다.

또한 석제 차맷돌도 발견되었는데, 비슷한 유물이 강화도 선원사지(禪源寺址)와 청주 사뇌사지(思惱寺址)에서도 확인되었다. 차 맷돌은 연고차(硏膏茶)를 製茶하는 데 필요한 다구이다.

 


중국 당대에 만들었던 병차(餠茶)를 더욱 견고하게 발전시킨 연고차를 맷돌에 넣고 갈아서 고운 가루를 내고, 이 차 가루를 뜨거운 물에 풀어 거품을 내어 마셨다. 즉 지금의 말차와 같은 음다법이다. 거품을 만들기 위해 뜨거운 물에 차 가루를 넣고 휘젓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병차나 연고차를 마시기 위해서는 茶碗의 입지름이 넓어야 한다. 중국 당대의 玉璧底碗이 대표적이다.

통일신라시대에 중국제 옥벽저완이 우리나라에 수입되어 경주 왕경 및 월지(月池), 익산 미륵사지 등 왕실 관련 유적과 사찰에서 많이 출토되고 있다.

옥벽저완을 모델로 하여 고려시대 초에 우리나라에서 만든 다완이 해무리굽완이다. 고려시대 문인들이 남긴 여러 詩文에 차맷돌이 등장하기도 한다.

이규보, 「차 맷돌을 준 사람에게 감사하며」
돌 쪼아 바퀴 하나 이뤘으니 돌리는 덴 한 팔을 쓰누나.
자네도 차를 마시면서 왜 나에게 보내주었나.
특히 내가 잠 즐기는 걸 알아 이것을 나에게 부친 거야.
갈수록 푸른 향기 나오니 그대 뜻 더욱 고맙네그려.

이 시에서 이규보에게 차 맷돌은 여러 가지 의미를 시사하고 있다. 낮잠을 쫒기 위한 수단으로도 사용 되었으나, 차 맷돌에는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히고 정신을 가다듬는 정신적인 도구로 사용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인로, 「승원에서 차를 갈다」
'바람[風輪]이 불지 않아 개미의 걸음이 느린데,
달 같은 도끼를 처음 휘두르니 옥가루가 날리네.
법희(法?)란 본래부터 참으로 마음대로인데,
맑은 하늘 우레 소리에 눈이 펄펄 휘날리네.'

고려시대 초에는 차 맷돌이 아니라 다연(茶硯)을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크고 넓은 발과 차를 갈 수 있는 육각형 또는 팔각형의 봉(棒)이 한 세트를 이룬다.

발의 내면과 봉의 바닥면은 유약을 입히지 않고, 어떤 경우는 발의 내면을 거칠게 긁어내어 딱딱한 차가 잘 갈릴 수 있도록 한 것도 있다. 월남사지에서는 이러한 다연도 출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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