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차문화 천년의 역사, 성전 월남마을로 오세요
[기고] 차문화 천년의 역사, 성전 월남마을로 오세요
  • 이현정 _ 이한영차문화원 원장
  • 승인 2023.08.29 1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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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정 _ 이한영차문화원 원장

저는 전라남도 강진군 성전면 월남마을에서 태어났어요. 월출산 남쪽마을이라고 해서 월남마을인데.. 어렸을 때는 저희 마을 이름이 싫었어요. '월남에 살아'라고 하면 대번에 들려오는 답은 '월남? 베트남? 베트콩이야?'였거든요. 하지만 지금은 월출산 남쪽마을, 달의 남쪽 월남(月南)이라는 이름이 참 좋습니다.

제가 태어나 자라고, 지금도 살고 있는 월남마을은 북쪽으로 월출산이 감싸듯이 안고 있는 마을입니다. 맥반석과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바위산임에도 불구하고, 월남마을에서 바라보는 월출산은 포근한 엄마의 품처럼 느껴집니다. 월출산이 품고 있는 월남마을에는 천년의 차문화가 흐르고 있어요.

월남사는 고려시대 한반도 차의 중심이었어요. 현존하고 있는 진각국사비에는 차시가 남아있고, 고려시대 차도구였던 차맷돌이 출토되었답니다. 우리나라 역사에서 차문화가 가장 융성했던 시절은 고려시대였어요. 불교문화와 함께 차문화가 발전했는데, 월남사라는 대사찰과 야생차가 가득 들어있는 월출산, 그리고 당시 최고급 다도구였던 고려청자가 있어서 월남사는 고려차의 중심이었답니다.

백운동 원림은 다산 정약용의 강진유배 시절 가장 어린 제자였던 이시헌의 집이었어요. 정약용은 백운동원림의 주인 이덕휘와 마음을 주고 받는 사이였어요. 다산이 해배되어 경기도로 떠날 때 강진의 제자들이 해마다 차를 만들어 보내드리기로 약속을 했어요. '다신계'라는 약속을 맺고 헤어진거죠. 그 차 약속을 다산의 어린제자 이시헌은 백운동원림으로 돌아와 평생 지켰답니다. 이시헌은 차를 직접만들어 보냈을 뿐 아니라, '記茶'라는 차에 대한 기록을 필사하여 남겼어요. 다시말해 백운동원림은 조선시대 차문화의 산실이라고 할 수 있어요.

다산 정약용의 집안에 차를 보내는 약속은 대를 이어 100년 넘게 지켜졌어요. 1818년에 해배되었으니, 그 후 100년이 지날 무렵은 일제강점기였어요. 대를 이어 차를 만들어 다산가에 보내던 이한영선생은 마흔살 무렵 일제강점기를 맞게됩니다.

일본은 우리나라를 지배하기 전에 이미 북미에 차를 수출해 재미를 본 나라였어요. 식민지 조선이라는 땅을 보니 차나무가 자라는 거예요. 그래서, 보성, 무등산, 정읍 등지에 차밭을 조성하고, 우리백성의 노동력으로 만들어진 차에 일본이름을 붙여서 판매를 하기에 이르렀지요.

이를 본 이한영선생은 "이렇게 가다가는 훗날 누군가는 조선에 조선의 차가 있었다는 것도 모르게 되겠구나."라고 생각하셔서, 한국 최초로 상업화된 차 브랜드를 만들었답니다. 그 차의 이름이 '백운옥판차'입니다. 앞면에는 '백운옥판차'를, 뒷면에는 매화로 우리나라 지도를 표현하고 '백운일지 강남춘신'이라는 시를 더했어요. '백운동 한가닥 나뭇가지에 날아든 강남의 봄소식'이라는 뜻이에요. 그리고 지금은 오설록이라는 대기업이 월출산 남쪽에 10만평의 다원을 가지고 있어요. 오설록은 현재 한국차 기업 중 가장 큰 회사라고 할 수 있죠.

정리해보면, 월출산 남쪽은 월남사의 고려시대 차문화, 백운동원림의 조선시대 차문화, 이한영생가의 한국근대기 차문화, 오설록의 현대의 차문화가 이어지고 있는 곳이예요. 한국차문화 천년을 품고 있는 곳이지요.

이러한 월출산 차문화 천년의 역사를 주제로 9월 1일 2시 월남마을에 위치한 '전라남도 교통연수원' 대강당에서 열립니다. 고려시대 월남사의 차문화는 건국대 석좌교수 조용헌 선생님이, 조선시대 백운동원림의 차문화는 성균관대 김세리 교수님이, 한국근대기 이한영생가의 차문화는 광주교육대 최원오 교수님이, 월출산 차문화의 미래전망은 한국티소믈리에 정승호 원장님이 발표하십니다. 많은 관심과 참석을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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