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毒)을 찬 시인, 찬란한 슬픔의 봄 김영랑
독(毒)을 찬 시인, 찬란한 슬픔의 봄 김영랑
  • 유헌 _ 시인·한국문인협회 이사
  • 승인 2023.08.16 0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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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광복절 특집, 가상 인터뷰 영랑 김윤식 시인 (유헌 _ 시인·한국문인협회 이사)

오는 15일은 광복절이다. 지역출신으로 민족시인인 영랑 김윤식 선생을 놓고 유헌 시조시인이 가상 인터뷰를 진행했다. 제목은 독(毒)을 찬 시인, 찬란한 슬픔의 봄 김영랑이다. 당시 독립을 앞두고 활동을 했던 영랑 선생에 대한 궁금증을 묻고 답하는 형태로 진행된 진솔한 이야기가 녹아들어 있다. 이 글은 월간문학 2023년 8월호에 게재된 것을 간추려 옮겼다/편집자 주|

 

때는 계묘년(癸卯年) 초하(初夏)의 오후 3시, 강진 영랑생가 은행나무 아래. 고목의 무성한 잎들이 짙은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나는 약속시간보다 일찍 도착해 생가 주변을 둘러보고 나서 은행나무 그늘로 돌아와 벤치에 앉아 선생을 기다렸다. 드디어 선생이 나타나셨다. 정확했다. 생가 안채 쪽에서 사랑채를 지나 성큼성큼 걸어오셨다. 검정 두루마기 자락을 펄럭이며 오셨다. 바람도 없는데 도포가 태극기처럼 휘날렸다. 나는 벌떡 일어나 사랑채 쪽으로 달려가 선생을 맞았다. 선생이 내게 악수를 청하셨지만 손을 맞잡을 수는 없었다.

*유헌_ 선생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아, 아니 처음 뵙겠습니다.
*영랑_ 반갑구먼. 나를 잊지 않고 이렇게 불러내줘 고맙네.

*유헌_ 생가는 오랜만이죠?
*영랑_ 파편에 맞아 9·28 서울수복 다음날 이승을 떠났으니까 73년이 흘렀어. 그래도 생각은 항상 여기 머물러 있다네.

*유헌_ 생가가 낯설지는 않습니까?
*영랑_ 낯설지. 몰라보게 변했어. 담 너머 시문학파기념관도 우뚝하고, 저기 사랑채는 1942년인가, 기억이 희미하네만 기와집으로 교체했는데 지금은 초가로 바뀌었구먼.

*유헌_ 사랑채 옆에 정구장이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지금은 잔디밭이지만요.
*영랑_ 맞아. 46년을 살았던 집이야. 내가 아버지를 잘 만난거지. 지금은 잔디가 파랗게 자라고 있구먼. 

*유헌_ 먼저 도착해 선생님을 기다리는데 사랑채 쪽에서 옛 명창들의 소리가 들리는 듯 했습니다. 선생님께선 성악가를 꿈꿀 정도로 음악을 좋아하셨다면서요?
*영랑_ 즐기긴 했지만 아버님의 반대가 심했어. 임방울, 박초월 등의 명창을 몇 차례 초청해 소리를 들었던 기억이 있네.

*유헌_ 선생님의 북 장단에 맞춰 명창들이 노래를 했고요. 선생님의 판소리 또한 명창들이 놀랄 정도의 수준이었던 걸로 알려져 있습니다.  
*영랑_ 과찬이긴 하네만 국악뿐만 아니라 베토벤과 슈베르트를 좋아했고 바이올린 연주도 즐겼었지.   

*유헌_ 이런 음악성이 자연스럽게 선생님의 시에 리듬으로 나타났군요. 당시 모란이 필 무렵이면 사랑채에 전국의 유명 문인들도 초청해 시창작대회를 열었다고 들었습니다.
*영랑_ 그랬지. 그날의 정경들이 눈에 선하구먼.

*유헌_ 1934년 4월 <문학>지에 발표하신 「모란이 피기까지는」도 그때 쓰신 거죠?
*영랑_ 맞아. 그런데 처음 시가 좀 맘에 들지 않았던 것 같아. 썼다가 구겨 버렸거든. 쓰레기통에 버리려고 했지. 

*유헌_ 그걸 빼앗아 춘원 이광수 선생이 참석자들 앞에서 큰소리로 낭독을 했고요.
*영랑_ 춘원이 "절창이야, 절창!" 이렇게 외쳤던 것 같아. 한바탕 박수갈채가 터지고 난리가 났어.

*유헌_ 천만 다행입니다. 국민 애송시가 세상에 나오기도 전에 사라질 뻔했으니까요.
*영랑_ 그러게 말이야. 참, 자네는 고향이 어딘가?

*유헌_ 장흥 선학동에서 태어나 강진에서 초·중학교를 마쳤고, 직장 퇴직 후 다시 강진에서 살고 있습니다. 선생님의 초등학교 후배입니다.
*영랑_ 그래? 강진중앙초 전신인 보통공립학교를 내가 1915년에 졸업했으니까 까마득한 후배를 만났구먼. 반갑네.   

*유헌_ 선생님, 안채 쪽으로 자리를 옮겨 말씀을 나누고 싶습니다.
*영랑_ 그럴까? 안채와 사랑채 사이에 담이 생겨 지금은 쪽문을 통해 오가는구먼.

*유헌_ 여기 모란꽃밭 앞 시비의 「동백닙에 빛나는 마음」이 선생님의 시 데뷔작이라고 들었습니다. 
*영랑_ 글쎄, 1930년 3월 <시문학> 1호 맨 앞에 실린 작품이니까 공식적인 데뷔작이라고 해야 맞는지 모르겠네. 그전에 이미 고향에서 김현구, 차부진 등과 『靑丘』라는 동인집을 내며 작품 활동을 했으니까. 그땐 참 순수했고 모두가 열심이었지. 시와 수필을 써와 치열하게 합평을 했는데 그게 내 문학의 출발점이었어.

*유헌_ 북에 소월이 있다면 남에는 영랑이 있다고들 말합니다. 순수 서정시 운동을 주도하셨고,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발굴하고 창조하는데 힘쓰신 선생님을 일컬어서요. 
*영랑_ 과분한 평가지만 고향 산천에서 보고 들은 시어들을 소재로 글을 쓰기 시작했으니까 그게 다 내 시의 원천이 된 거지.     

*유헌_ 대숲 동백나무를 보니 생각나는 게 있습니다. 여쭤봐도 될지 모르겠습니다. 전설의 무희 최승희 선생과의 러브스토리요.
*영랑_ 허허 참, 관심들이 많구먼. 당사자인 나는 죽고 사는 문제였는데 말이야. 혼담까지 오고갔지만 양가 부모님의 반대가 무척 심했어.

*유헌_ 그래서 저 동백나무 가지에서 자살까지 기도하셨군요. 최승희 선생과의 염문을 문단에서는 세기의 사랑이라고 불렀다면서요?
*영랑_ 다 지나간 일인데 뭐. 사람은 가고 없어도 뒤란의 동백나무는 여전하구먼.

*유헌_ 「모란이 피기까지는」이 최승희 선생과의 사랑과 상실의 아픔을 노래하고 있다고 얘기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나는 아직 기다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그래서 선생님의 사랑은 여전히 현재형이라고요. 
*영랑_ 그래? 하하 그건 마음대로 생각하시게.

*유헌_ 특별히 아끼시는 시는 어떤 작품인지 궁금합니다.
*영랑_ 글쎄, 「독을 차고」란 시가 떠오르는구먼. 

*유헌_ 순수시 운동을 지향하셨는데, 이 작품은 독(毒)이라는 상징적인 소재로 일제의 탄압에 저항한 시로 알고 있습니다.
*영랑_ 그 당시 죽음을 각오하고 일제에 항거했던 것 같아.

*유헌_ 선생님은 고향 강진에서 독립만세 운동을 주도하다 체포돼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습니다. 신사참배도 창씨개명도 끝까지 거부하셨고요.
*영랑_ 휘문의숙 3학년 때 3·1운동이 일어났어. 그때 기미독립선언서를 구두창에 숨기고 고향 강진으로 내려왔지. 3월 23일 밤으로 기억하는데, 강진읍 서성리 대숲 안 김위균의 집에 모여 만세운동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그게 그만 경찰에 발각이 된 거야. 동지들과 함께 체포가 돼 모진 고초를 겪었어.

*유헌_ 그게 기폭제가 돼 4월 4일 생가 뒤 보은산 비둘기 바위에서 대형 태극기가 휘날렸고, 이 신호에 맞춰 강진 장터에서 독립만세운동이 거세게 일어났습니다. 역사적인 순간이었습니다.
*영랑_ 다 오래 전의 일이구먼. 요즘 일본과의 과거사 문제 등으로 시끄럽던데,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어. 참 안타까운 일이야. 

*유헌_ '영랑'이라는 필명도 그쯤에 지으셨다면서요?
*영랑_ 감옥에서 풀려난 후 몸을 추스르기 위해 금강산 장안사에 두어 달 머문 적이 있었어. 그곳에서 부드러운 영랑봉의 포근함에 반해 그냥 내가 봉우리는 놔두고 영랑만 훔쳐왔지.

*유헌_ 음악적 리듬의 선생님 시세계와도 잘 어울립니다. 그런데 시조를 쓰는 시인으로서 아쉬운 게 있습니다. 시조를 쓰신 시문학파 시인들이 계셨는데, 시문학지가 3호로 종간이 돼 버려 늘 안타까웠습니다. 
*영랑_ 창간호 편집 후기에 앞으로 시조의 소개 등에도 힘을 다하겠다고 적었던 기억이 있어. 용아 박용철과 수주 변영로 등이 시조를 즐겨 썼고 나도 사행시를 많이 발표했던 걸로 기억하네.

*유헌_ 시문학지가 종간되지 않았다면 선생님도 우리 시 시조를 지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영랑_ 이병기 등과 시조부흥운동을 펼쳤던 정인보 선생이 시문학파의 일원이었으니까 내가 일찍 죽지 않았다면 나도 시조를 썼을 가능성도 있지. 시조는 세상 어느 곳에 내놓아도 당당하고 자랑스러운 우리 한국인의 정신 그 자체니까 말이야. 내 몫까지 좋은 글 많이 써 주시게.

*유헌_ 끝으로 선생님의 묘소 이전에 관해서 여쭤보겠습니다. 알고 계시는지요.
*영랑_ 어렴풋이 조금은.

*유헌_ 세상을 갑자기 떠나신 후 한남동 가묘에 계시다가 54년 망우리로, 지금은 용인 천주교 묘역에 계십니다.
*영랑_ 글쎄, 내 묘소 이전에 관해서는 이승을 떠난 사람으로서 뭐라 언급하기가 어렵네만 관계자들이 여러 의견을 잘 듣고 처리하지 않겠나. 내 3남 현철과 막내 애란의 생각도 있을 거고.

*유헌_ 생가 은행나무 앞 정구장 부지 한쪽에 베토벤 묘의 형태를 참고해 이전했으면 좋겠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영랑_ 영랑생가는 46년을 살았던 집이니까 그곳에서 영면하면 나야 좋겠지. 그런데 어디까지나 군과 군민들이 결정할 문제 아니겠나.

*유헌_ 예술가 등 유명인들의 묘지도 문화가 되고 역사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선생님의 영원한 안식을 기원합니다.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인터뷰를 마치고 머리를 숙여 꾸벅 작별 인사를 드렸다. 고개를 들고 바라보니 선생은 이미 저만치 가 계셨다. 그리고 사랑채 쪽문으로 금세 사라졌다. 은행나무 잎새가 크게 한번 흔들렸다. 생가 뒤 보은산 비둘기바위 너머로 흰구름이 떠갔다.
 (月刊文學 2023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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