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로] 화성으로 간 남자
[다산로] 화성으로 간 남자
  • 유헌 _ 시인·한국문인협회 이사
  • 승인 2023.07.18 1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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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헌 _ 시인·한국문인협회 이사

그랬다. 남자가 화성으로 갔다. 31살 젊은 나이에 말이다. 화성에 신도시를 건설하라는 명을 받고 화성으로 날아갔다. 남자는 하늘의 이치, 천문지리에 능통했다. 수학자요 과학자, 의학자이기도 했던 남자는 화성 건설을 위한 설계에 들어갔다.

1792년 초여름, 남자는 왕의 부름을 받는다. 부친의 3년상을 치르기 위해 고향에 내려와 있었지만 남자는 지체 없이 입궐했다. 대왕과 마주 앉았다. 왕은 책 한 권을 남자에게 툭, 건넸다. '기기도설'이었다. 서양 기계들의 원리를 적은 책이었다.

남자는 밤낮으로 기기도설과 씨름을 했다. 온몸이 땀으로 뒤범벅이 되었다. 눈도 침침해졌다. 그렇게 기계들의 이치 파악에 온통 몰두했다. 조선의 현실에 맞는 기계를 만들어내기 위해 고민 또 고민을 했다. 공사기간을 줄이고 공사비도 줄여야 했다. 백성들의 땀도 덜어야 했다. 

남자가 기본 설계를 마치고 성설(城設)을 지어 왕에게 올렸다. 화성건축의 핵심사항들을 8개 항목으로 정리한 설명서, 성설을 왕이 즉시 재가했다. 돌을 깎아 성을 쌓되 여느 성보다 더 크고 높게 짓도록 했다. 형태와 기능 면에서 세상 어느 성보다 낫도록 설계했다. 남자는 아이디어를 총동원했다.

드디어 첫 삽을 떴다. 왕조의 사활을 건 장기 프로젝트, 조선판 신도시 건설의 서막이 오른 것이다. 때는 1794년 정월이었다. 거중기가 올라가고, 유형거가 달리고, 녹로가 돌아갔다. 팔도에서 모인 벽돌공들이 흙벽돌을 찍어냈다. 남자가 만든 기계들은 공사비용과 기간을 단축시키고 백성들의 수고를 크게 덜어줬다.  

화성 탐사선 그 상상 속 우주인처럼 남자가 화성에 첫발을 내딛었다 한바탕 붉은 흙바람이 휩쓸고 지나갔다 붓끝이 흔들렸다 닥종이 도면이 연처럼 날아갔다 그려라 왕조의 꿈 쌓아라 철옹성을, 돌려라 돌려 돌려 도르래를 빙빙 돌려 거중기 높이 세워 세상을 들어 올려라 백성을 하늘처럼 받들어 올려라 수원화성華城은 백성을 지키는 성이고 백성의 터전이었다 백성의 나라였다 남자가 그린 세상은 백성이었다 그 남자, 다산이 그린 세상 정조의 꿈이었다
-유헌, 사설시조 「화성으로 간 남자」 전문

정조대왕은 왜 그 남자, 다산에게 '기기도설'의 이치를 깨우치라고 했을까. 수원화성을 다산에게 디자인하라고 했을까. 왜 다산과 함께 왕조의 꿈을 펼치려고 했을까. 물론 다산의 수학적 재능과 과학적 역량 등 그의 능력을 높이 산 게 1차적인 이유였겠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상과 철학이 서로 맞아 떨어졌기 때문이 아닐까. 백성을 먼저 생각하는 애민사상 말이다.

수원화성을 짓는 백성들에겐 품삯을 지급했다. 일한 만큼 다르게 줬다. 그냥 강제 동원한 게 아니었다. 10년에 끝날 일을 2년 8개월 만에 완공했다. 방어만을 위해 성을 쌓지는 않았다. 성안에서 백성들이 살 수 있도록 도읍을 지었다. 백성을 위하는 정조와 다산의 마음이 맞닿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다산과 함께 수원화성을 건설한 정조의 기록정신 또한 우리의 빛나는 유산이 되었다. 성의 설계에서부터 완성까지 전 과정을 세세히 기록했다. 기계 장비의 사용법은 물론 공사에 참여한 장인들의 이름까지 '화성성역의궤'에 남겼다. 후대를 위해서였다. 한국전쟁 중 폭격으로 누각 등이 불에 탔지만 그 기록이 남아 있어 원형에 가깝게 복원해 수원화성은 1997년 유네스코가 정한 세계문화유산으로 당당히 이름을 올렸다.

그 남자 다산이 강진으로 왔다. 화성 건설을 마친 지 5년 만이었다. 1801년 동짓달, 칼바람 삭풍을 가슴에 안고 무거운 발걸음으로 강진 땅을 밟았다. 그리고 귀양지 강진에서 500 여권 저술이라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남겼다. 백성을 위한 그의 행보는 강진에서도 이어졌다. 그 다산을 품은 우리 강진이 자랑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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