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로] 팜스프링스에서 다시 본 비디오 아트
[다산로] 팜스프링스에서 다시 본 비디오 아트
  • 하종면 _ 향우, 변호사
  • 승인 2023.06.27 1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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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종면 _ 향우, 변호사

백남준을 아시나요. 미국 LA에서 자동차로 동쪽으로 한 시간 정도 가면 온타리오 공항과 온타리오 밀스가 있는 온타리오시가 나온다. 온타리오 밀스는 연간 방문객이 2,800만 명이나 되는 캘리포니아 최고의 쇼핑 및 관광지이다. 온타리오시에서 차로 다시 동쪽으로 한 시간 남짓 가다 보면 키 작은 관목들이 듬성듬성 나있는 사막지대를 지나고 인디언 보호구역을 지나서 야자수 가로수들이 멋있게 늘어서 있는 팜스프링스 다운타운이 나온다.

팜스프링스는 인구 5만 명을 약간 밑도는 도시로 그림 같은 골프장이 여기저기에 있고, 하이킹 등 다양한 레크레이션을 즐길 수 있는 휴양지로, 샌디애고와 더불어 미국인들이 은퇴 후 살고 싶은 곳으로 손꼽는 지역 중의 하나이다. 수년 전 온타리오시에서 묵으면서 예정된 일정을 마치고 다음 날 오전에 머리도 식힐 겸해서 차를 운전해서 팜스프링스로 향했다. 온타리오 숙소 호텔에서 본 안내 책자에 팜스프링스 미술관(Art Museum)이 소개되어 있어 시내 구경도 하고 미술관을 둘러보기 위해서였다. 

미술관 1층 입구에 들어서니, 세련된 백인 할머니 한 분이 열 두세 명 정도 되는 초등학생들과 남녀 두 명의 선생님 앞에서 무슨 말을 하고 있었다. 뒤에서 잠깐 들어보니 학생들에게 미술관에 전시된 작품에 대하여 설명을 하게 되어 있는 자원봉사자 할머니가 이제 막 미술관 투어를 시작하는 참이었다. 좋은 기회다 싶어서 할머니와 선생님들에게 방해하지 않고 뒤에 따라다니면서 설명을 들어도 되느냐고 요청했더니 흔쾌히 허락을 해주었다.

해설사 할머니는 각방 마다 돌면서 전시된 작품의 작가, 주제, 기법 등에 대하여 설명을 해 주었는데, 인상이 깊었던 곳은 그곳 출신의 화가가 그린 풍경화 등을 전시한 방에서였다. 그 화가가 그린 것은 한 호수가 모습을 시간을 달리하여 그린 것인데, 그림마다 전혀 다른 호수같이 보였고, 보는 느낌도 너무 달랐다. 해설사 할머니의 원근법을 겻들인 설명을 듣고 나서야 같은 호수이고 같은 작가가 그렸다는 것을 알았다.

해설사 할머니는 어린 학생들의 여러 질문에 친절히 설명하였고, 만질 수 있는 설치미술품에 대하여는 만지게 하고 어떤 느낌인지 질문을 던지고는 하였다. 이렇게 설명을 들어가면서 미술관 관람을 하다 보니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어느덧 건물 맨 꼭대기 층에 있는 투어의 마지막 방에 이르렀다. 그런데 방 한쪽에 텔레비전 모니터 수십 개가 층을 이루어 쌓아져 있었다.

어디선가 본 듯하여 가까이 보니 백남준 선생의 비디오 아트이었다. 반갑고 자랑스런 마음이 앞서서 뒤에 조용히 따라다니겠다고 한 약속을 그만 어기고 해설사 할머니에게 백남준 선생은 한국의 유명한 비디오 아티스트라고 소리치듯 말하였다. 그런데 어쩐지 해설사 할머니 반응이 별로였다.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작품을 둘러보면서 비디오 아트 뒤쪽에 이르니 작가를 설명한 명패에 백남준 선생의 국적이 미국으로 적혀 있다. 망치로 머리를 한 방 맞은 기분이었다.

필자는 지금으로부터 20~30년 전에 과천에 있는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백남준 선생의 비디오 아트를 처음으로 접하였다. 미술이라고 하면 풍경화나 조각 정도 생각하고, 공부라고 하면 국어, 영어, 수학이고, 그것도 외우는 것을 잘해야 공부 잘하는 학생이라고 평가받던 시절에 교육을 받았던 필자로서는 솔직히 무슨 작품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데 세월이 한참 흘러 팜스프링스에서 백남준의 선생의 비디오 아트를 다시 보니 백남준 선생은 미국에서도 알아주는 예술가이고, 그 분이 당연히 한국 국적이라는 생각에 자랑스런 기분이 들어서 백남준 선생이 한국 사람이라고 말했던 것이다.

국제화 시대에 백남준 선생이 대한민국 국적인지 한국계 미국인인지, 그의 부인이 일본사람이라는 것은 뭐 그리 대단한 일은 아닐 것이다. 중요한 것은 백남준 선생이 수십 년 전에 지금의 디지털 시대를 내다보고 시대를 앞서는 작품 활동을 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처음에는 피아노를 연주하다가 비싼 피아노를 도끼로 부셔버리는 기이한 행동을 하는 전위예술가 정도로 혹평을 받았으나, 이런 평가에 연연하지 않고 꾸준히 노력하고 작품 활동을 계속한 끝에 2000. 1. 1.에는 밀레니엄을 기념한 그의 비디오 아트 작품 ‘호랑이는 살아있다(Tiger is Alive)’가 우리나라는 물론 미국 CBS방송을 통하여 전 세계에 송출될 정도로 세계적인 예술가로 평가받았다는 것이다.

백남준 선생은 특이하게도 미국 등 여러 나라에서 작품 활동을 하여 세계적인 예술가로 평가를 받은 후에 역으로 우리나라에서도 인정받았고, 작품 제작 당시에는 남들이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던 첨단 기술매체(예컨대 바보 TV 상자)를 종합예술인 그의 작품에 접목하기 위하여 텔레비전 회로 등 관련 공학 공부를 하고, 비디오 신디사이저(영상편집기) 등 당시에는 없었던 장비를 스스로 만들기도 하였다.

작고하신 이어령 선생은 생전에 “백남준은 한국에서 예술을 했다면 이렇게 세계적으로 유명한 거장이 되었을까? 나는 가끔 주변 이들에게 이야기한다. 아마도 힘들었을 거라고. 아쉽게도 한국 사회는 귤을 맛있는 귤로 키우지 못하고 탱자로 만드는 경향이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한국을 일찍 떠난 덕분에 한국인의 원형적 심성과 내면을 가장 잘 보존한 사람이 되었다고 나는 믿는다. 그리하여 그가 만든 작품 앞에서 우리는 읽어버린 기억과 한국의 문화적 유전자를 대면하게 되는 것이다.”라는 말씀을 남기셨다고 한다.

백남준 선생은 서울 종로에서 태어났으니 서울 종로가 고향이다. 내 고향 강진에서도 수십 년을 미리 내다보는 세기(世紀)적인 위대한 예술가가 나오지 말라는 법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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