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로] 다산의 자녀교육 방법
[다산로] 다산의 자녀교육 방법
  • 김제권 _ 수필가
  • 승인 2023.06.20 10:0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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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제권 _ 수필가

어린아이가 태어나서 맨 처음 보고 듣고 배우는 장소가 가정이다. 내가 어릴 적 할머니는 어린 손자를 무릎에 앉혀 놓고 삶의 지혜와 교훈이 담긴 옛이야기를 들려주시곤 했다.

"부모는 자녀의 거울이다"라는 말이 있다. 자녀는 어려서 부모의 훈육 방식에 따라 성격을 형성하는데 많은 영향을 끼친다고 한다. 자녀들의 기억 속에 부모의 형상은 변질되지 않고 원형 그대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몹시 위태롭고 절박한 순간에 자녀교육을 철저히 했던 다산 정약용(1762-1836)의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의 사례를 들어 본다.

조선 후기 문예부흥을 가져왔던 정조 대왕은 다산의 성실함을 믿고 조아지사(爪牙之士)처럼 여기며 살았다. 정조 대왕이 급작스럽게 승하하자, 다산은 노론과 남인의 당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경상도 포항으로 유배 되었고, 몇 달 후 황사영 백서사건이 발생하자 한양으로 압송되어 생사의 기로에서 전라도 강진으로 유배지를 옮기게 되었다.

다산은 신산하고 척박한 유배지서 저술에 몰두하며 자신의 경험과 생각을 담아 쓴 편지가 60여 편 정도 된다. 특히 신유사옥으로 풍비박산 난 집안을 끌어가는 학연. 학유 두 아들에게 훈계와 가르침의 글이 많이 실렸다.

두 아들에게 전했던 교훈과 안부 편지는 지금의 비대면 원격 교육과 닮았다고 생각된다.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의 내용은 조선 당대 최고의 실학자보다 자상한 아버지모습이 잘 드러나 있다.

오랜 세월 두 아들을 곁에 두고 가르치지 못한 안타까움을 숨김없이 토로하며 몰락한 가족이라 손가락질 받지 않게 게으름 피우지 말 것과 독서를 열심히 해야 할 것을 강조 했다. 두 아들에게 정신적 유산으로 근검의 덕목을 지칭하며 그 의미를 상세하게 드러내 실천하도록 교육했다.

유배생활 16년 째 되던 해다. 둘째 아들 학연으로부터 한 통의 편지를 받았다. 자신을 모함하여 곤경에 빠뜨렸던 무리들에게 선처를 구한다는 편지 한 통만 보낸다면 그들 도움으로 유배에서 풀려 날 것 같으니 그들에게 동정을 구해 보는 것이 좋겠다는 내용이었다. 그 패거리 중에는 옛 친구 이기경이 있었다.

이기경은 어려서부터 천주교 관계 서적을 함께 읽었고 문과에 나란히 급제 했던 다정한 친구였다. 그러나 1791년 다산의 외사촌 윤지충이 진산에서 신주를 불사르고 제사를 지내지 않았던 사건으로 순교하자 돌연 입장을 바꿔 천주교를 배척하며 강력한 반대의 소와 상소를 올렸다. 그날 이 후 다산이 화해의 손을 내밀수록 그는 더 멀리 달아나 신유박해가 닥쳤을 때 다산을 역적으로 몰아 끝까지 죽이려 했던 인물이다.

다산은 가슴에서 치밀어 오르는 분통을 쓸어내리며 아들에게 편지를 썼다.

"아들 학유야! 천하에는 두 가지 큰 기준이 있는데 옳고 그름의 기준이 하나요. 다른 하나는 이롭고 해로움에 관한 기준이다. 이 두 가지 큰 기준에서 네 단계 등급이 나온다. 첫 번째 옳은 것을 지켜서 이익을 얻는 것이 가장 높은 등급이다. 두 번째 등급은 옳은 것을 지켜서 손해를 입는 것이다. 세 번째 그름을 쫓아 이익을 보는 것이다. 네 번째 그름을 쫓아 손해를 보는 것이다. 내가 그들에게 구걸하여 화를 면해 보려는 것은 세 번째 등급을 선택하는 것이다. 그름을 통해 이익을 취한다면 언젠가 해로움으로 떨어지게 되는데, 장차 가장 낮은 단계로 내려가는 것이 명확한데 무엇 때문에 내가 그 짓을 해야 되겠느냐"

다산은 자신이 비록 폐족이 되어 그동안 편지 한 통 왕래가 없었는데 먼저 머리를 조아리며 간청하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는 소신을 피력한 것이다.

"아들 학유야! 귀양이 풀려 고향집으로 돌아가느냐 못 돌아가느냐는 중요한 일이지만 죽고 사는 일에 비하면 극히 작은 일이다. 사람이란 때로 공들여 잡은 고기를 버려야 할 때도 있고, 곰처럼 미련한 방법을 택해야 할 때도 있듯 삶을 버리고 죽음을 택해야 할 때도 있는 법이다. 조그만 일에 정도를 어기고 애걸복걸하며 산다면 나라에 외침이 있어 난리가 나면 임금을 배반하고 적군에 투항하지 않을 사람의 숫자가 얼마나 많겠느냐, 마음을 다스리며 세월을 기다리는 것이 옳으니 다시는 원칙 없는 일에 매달리지 말아야 한다."

아들에게 편지를 보내고 2년 후 해배되어 꿈에 그리던 고향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마침내 첫 번째 등급 옳음을 지키면서 이익을 얻은 것이다.

극한 상황에서도 자녀 교육은 엄격함과 자애로움을 병행하여 올바른 선택의 길을 제시해 주었던 아버지와 숭고한 뜻을 받들어 표리부동하게 살지 않고 당장은 힘들고 손해를 보더라도 옳은 길을 걸었다.

핵가족시대로 사라진 밥상머리 교육이 아련한 아쉬움으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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