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는 제다의 연금술이다
차는 제다의 연금술이다
  • 강진신문
  • 승인 2023.05.22 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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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정 박사가 들려주는 우리차 이야기(5)

 

월출산 야생차로 비발효차 녹차 제다

차는 연금술이다. 철(鐵)이라고 하는 광물질을 금으로 바꾸려는 화학적 시도가 연금술이라고 한다면, 찻잎이라는 식물질을 가지고 정신 수양의 음료를 빚으려는 화학적 시도가 제다(製茶: 차를 제조하는 과정)이다.

연금술에서 말하는 황금이 불멸(不滅.immortality)을 상징한다면, 차가 목표로 설정한 번뇌의 제거는 자유(freedom)를 상징한다. 불멸과 자유는 인간의 궁극적 목표이자 영원한 이데아이다. 연금술에서 생각했던 핵심 과정이 수은과 납이었다고 한다면 제다에서는 발효와 비발효가 여기에 해당한다. 제다 공정의 전부는 발효(醱酵)와 비발효(非醱酵)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차는 제다 방법에 따라 크게 발효차와 비발효차로 구분된다. 찻잎에 열처리를 하느냐 하지 않느냐에 따른 분류다. 열처리는 다른 말로 살청(殺靑)이라고 한다. 찻잎에 뜨거운 열을 가하여 찻잎 안에 있는 폴리페놀 옥시데이즈(Polyphenol oxidase)라는 효소를 불활성화시키는 공정이다.

이 효소는 공기 중 산소가 더해지면 산화중합반응을 일으켜 갈변현상을 일으킨다. 차에서는 이 현상을 발효라고 한다. 따라서 열처리하여 불활성화시키면 비발효차가 되고, 열처리하지 않고 활성화시키면 발효차가 되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차의 6가지 종류, 즉 육대다류(六大茶類) 중 녹차만 비발효차이고, 나머지 백차, 청차, 홍차, 황차, 흑차는 발효차이다. 그리고 발효차는 효소 활성의 방법과 시간 등에 따라 백차, 청차, 홍차 계열과 황차, 흑차 계열로 다시 세분화된다.

녹차(綠茶, green tea)는 비발효차이다. 녹차 제다에서 열처리는 매우 중요하다. 열처리 방법으로는 초청(炒靑)과 증청(蒸靑)이 있다. 초청은 찻잎을 솥에서 덖어내는 방식이고, 증청은 찻잎을 수증기로 찌는 방식이다. 솥은 쇠로 되어 있다. 이 솥에다가 불을 가해서 쇠를 달군다. 달군 쇠솥에다가 여린 녹색의 찻잎을 살짝 덖는 것이다. 증청은 수증기로 가열하는 방식이다. 쇠솥에 직접 덖는 것보다는 간접적이다. 중간에 수증기가 작동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초청과 증청에서 불과 물은 매우 중요한 작용을 한다. 말하자면 불과 물은 화학적 변화의 중매자이다.

불과 물을 다룬다는 것은 우주의 근원적 요소를 다룬다는 것을 의미한다. 불과 물은 어떻게 작용하느냐에 따라 생명의 탄생과 소멸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모든 존재의 생멸을 좌우하는 본원적 요소가 불과 물인 셈이다. 제다 과정을 꼼꼼히 들여다보면 그 가장 밑바탕에 이러한 불과 물의 상호 작용이 놓여 있다. 초청과 증청은 제다 과정에서 불과 물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의 방식에 따른 차이인 것이다. 그 점에서 육대다류 중 녹차만이 쇠솥이라는 불기운과 수증기라는 물기운의 세례를 받고 발효가 중지되어 독야청청의 단계로 진입한 차라고 할 수 있다.

 

녹차는 어린 찻잎을 뜨거운 솥에 덖거나 쪄서 만든다. 찻잎도 어린 찻잎이 차의 맛을 부드럽게 만든다. 찻잎을 따 모아 티를 골라낸 뒤 준비한 솥에 덖거나 시루에 쪄서 비빈다. 덖거나 쪄서 비비는 공정을 여러 차례 반복한 뒤 건조한다.

여기에서 의문을 가져야 할 부분은 여러 번 반복한다는 점이다. 왜 여러 번 반복하는가? 반복의 장점과 효능은 무엇인가를 물어야 한다. 그 해답은 역시 부드러움이다. 여러 번 덖고 찌는 과정은 찻잎이 가진 식물성 기운의 강력함을 누그러뜨리는 작용을 한다.

찻잎은 '茶'라는 글자가 함축하듯이 풀 초()이면서도 나무 목(木)의 기운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나무 목의 기운을 약화시키는 공정이 여러 번 찌고 덖는 과정인 것이다. 실제로 찌거나 덖는 공정을 반복할수록 차의 대표적 약성(藥性)인 카테킨(Catechin)의 함량은 감소하고, 차의 감칠맛을 좌우하는 데아닌(Theanin)의 함량은 높아진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녹차 제다 공정을 다시 정리하면 채엽-선별-살청(열처리)-유념-건조인데, 이 과정이 매우 간단하게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실전에서는 녹록한 과정이 아니다. 초의선사(草衣禪師, 1786~1866)가 동다송(東茶頌)에서 '채진기묘(採盡基妙) 조진기정(造盡基精)'이라고 하였듯이, 찻잎을 따는 일부터 만드는 일에 모든 마음을 다해야 하기 때문이다.

녹차는 조선 후기에 들어 본격적으로 유행하였던 듯하다.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1762 ~ 1836)은 강진 유배가 끝나고 제자들과 헤어지면서 다신계(茶信契)를 맺었는데, 그 내용에 '穀雨之日取嫩茶 焙作一斤'이 있다. '곡우에 어린 찻잎을 따서 낮은 불에 덖어 한 근을 만든다'는 뜻이다. 초의선사는 다신전(茶神傳)에서 '將茶一斤半焙之 候鍋極熱 始下茶急炒'라고 하였다. '차 한 근 반을 불에 익히는데 솥이 몹시 뜨거워졌을 때 급히 덖는다'는 뜻이다. 조선 후기 진도로 귀양 온 실학자 이덕리(李德履·1725~1797)는 동다기(東茶記)에서 '敎以蒸焙之法', 즉 '차를 쪄서 말리는 법을 가르친다'라고 하였다.

이로 보건대 조선 후기에 들어서 녹차에 대한 제다법들이 다양하게 시도되었다는 점, 녹차 제다의 핵심이 찻잎을 덖거나 찌는 일이라는 점 등을 알 수 있다.

조선 후기에 찻잎에 열처리하는 다양한 방식이 시도되었고, 이는 근대기 한국 최초의 차 상표로 알려진 백운옥판차(白雲玉版茶)의 4등급 제다법에 그대로 계승되었다.

백운옥판차를 만든 이한영(李漢永, 1868~1956)은 1아(芽)의 어린잎을 낮은 불에 덖어 만들어 맥차(麥茶)라고 하였고, 1아 1엽과 1아 2∼3엽은 센 불에 덖어 각각 작설(雀舌)과 모차(矛茶)라고 하였으며, 넓어진 찻잎은 시루에 쪄 기차(旗茶)라고 이름하였다. 이를 종합해 보면 다산 이래로 내려온 제다법이 초의선사, 이덕리로 전승되어 왔고, 이 제다법이 다시 이한영대로 내려오면서 맥차, 작설, 모차, 기차로 세분화되었다. 찻잎에 따른 각각의 덖음과 찌는 방식이 세분화된 것이다.

세분화라고 하는 것은 발전된 양태이다. 문제는 디테일이다. 디테일을 어떻게 가다듬느냐가 제품의 질적 비약을 판가름하기 때문이다. 맥차에서 기차까지 분류한 방식은 이한영이 최초일 것이다. 다산, 초의를 바탕으로 제자가 이를 뛰어넘는 새로운 기준과 방식을 개발해냈다고 할 수 있다.

이한영이 제시한 새로운 기준을 짚어 보자. 기존까지는 24절기라는 시기로서 차의 등급을 규정하였다. 예를 들면 청명차, 우전차 등이 그렇다. 그러나 이한영은 절기가 아니라 찻잎의 형태를 가지고 차의 종류를 규정하는 시도를 하였다. 왜냐하면 절기는 중국의 기후조건에 맞춘 분류법이다. 조선은 중국과는 위도가 다르다. 당연히 중국 절기와 차이가 있다. 이 차이를 극복하는 방법이 찻잎의 상태에 따라 구분하는 법이다.

그래서 이한영은 중국의 기후에 맞는 절기보다는 한국의 기후와 토양에 맞는 찻잎의 모양에 따라 새로운 스탠다드를 제시하였던 것이다. 맥차, 작설, 모차, 기차의 분류가 한국 이한영식의 분류인 것이다. 이는 중국적인 기준으로부터의 부분적인 독립이기도 하다. 새로운 방식을 세상에 제시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누구도 가보지 않았던 길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이한영의 노력과 고뇌가 작용했을 것이다.

이러한 4가지 방식의 제다법은 조선차에서 현대의 한국차로 넘어오는 시대구분의 분기점으로 보아도 되지 않나 싶다. 이한영의 4가지 제다법 이전이 조선차라고 한다면, 이후는 현대 한국차라고 말이다. 즉 19세기와 20세기의 전환기에 이한영 차가 세상에 나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하겠다.

찻잎은 제다인의 손에 의해 차로 거듭난다. 차나무에서 떨어져 나온 찻잎은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자기라는 에고(ego)를 한번 죽이고 다시 거듭난 차는 인간의 오장육부에 들어가서 인간을 거듭나게 만든다. 연금술이 광물적 에너지를 인간의 몸에 적용시켜 보려는 우주적 상상력이라면, 제다는 식물적 에너지를 인간의 몸에 적용시켜 보려는 우주적 상상력인 셈이다.

다시 차의 계절이 돌아왔다. 차 한 잔에 우주의 본원적 에너지를 느껴보는 것은 어떨까. 차를 가까이에 두고 차의 색, 향, 미에서 하루쯤 우주의 중심에 서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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