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로] 인과응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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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제권 _ 수필가
  • 승인 2023.01.25 0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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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제권 _ 수필가

중국 춘추오패 중 한 사람 초나라 제22대 장왕(莊王)에 관한 이야기다. 중원의 패권을 놓고 칼바람이 세차게 불던 춘추전국시대 초나라 군주는 치열한 전투에서 승리하고 돌아온 장수들의 공적을 치하하기 위해 연회를 벌였다.

그 연회의 중요성을 감안해서 왕이 평소 아끼던 애첩도 시중을 들기 위해 함께 참석했다. 아침부터 연회가 시작되었는데 어느덧 날이 저물어 참석자들은 취기가 온몸에 달아올랐다.

난데없이 골짜기서 광풍이 몰아치더니 잔칫상 위의 촛불을 강타하자 연회장은 순식간에 어둠에 휩싸였다.

"까악"하는 여성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한 장수가 어둠을 틈타고 장왕의 애첩을 끌어안고 가슴을 더듬고 입술에 입맞춤을 한 것이다.

"전하 어떤 자가 저의 가슴을 만지고 입술을 훔치며 농락했습니다. 그 자의 갓끈을 뜯어 표시해 놓았으니 색출하여 엄벌해 주소서"하고 간청했다.

후궁은 왕의 전유물로 누구든지 그녀를 넘보거나 손을 댄 자는 왕에 대한 불경죄로 다스려 본인은 물론 온 가문이 능지처참을 당해도 충분한 중죄다. 모든 장수가 두려움에 벌벌 떨고 있을 때 왕은 후궁을 다독여 연회장에서 내 보낸 후 말했다.

"자 오늘은 경들이 나와 함께 즐겁게 술을 마시는 날이다 격식을 차리지 말고 편히 연회를 즐기라. 이처럼 즐거운 날 함께 술을 마시다 취해 잠시 예를 잃었다 한들 어찌 그 일로 사내대장부를 욕보인단 말인가, 오늘 과인과 술을 마시며 갓끈이 끊어지지 않은 자가 있다면 그자는 오늘 연회가 즐겁지 않은 자로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 왕은 연회장의 불을 켜도록 했다. 연회에 참석한 장군과 신하 모두가 갓끈을 끊고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잔치를 마쳤다.

왕의 그릇의 크기를 짐작케 하는 사건이었다. 그날 갓끈이 끊겼던 장수는 이 후 왕을 위해 간과 뇌를 땅에 바르고 죽는 것과 전쟁터에서 자신의 목에 피를 적군에 뿌려 왕이 베풀어준 은혜에 보답하기로 결심했다.

그 후 3년이 흘렀다. 진나라가 초나라를 공격해 왔다. 초반에 진나라의 강력한 기습 공격으로 초나라 장왕의 목숨이 매우 위태롭게 되었다. 그 때 이름 없는 한 장수가 온 몸에 피투성이로 선봉에서 용감히 싸워 왕을 구하고 적군을 물리쳐 승리로 이끌었다. 이를 기특하게 여긴 장왕이 그 장수에게 큰상을 내리려고 사연을 물었다.

"과인은 너에게 덕을 베풀어준 것이 하나도 없는데, 무슨 연유로 목숨도 아까워하지 않고 용감하게 싸워 나의 목숨을 건져주고, 쫓기던 전투에서 승리하게 한 것이냐?"

그때서야 그가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신은 이미 3년 전에 죽었어야 할 몸이었습니다. 그날 밤 연회서 왕의 애첩을 희롱하다 갓끈이 끊겼던 자입니다. 술에 취해 예를 잃고 죽을죄를 저질렀지만 소인의 허물을 아무도 모르게 감싸주셨습니다. 소인은 그 날부터 대왕께 은혜 갚을 날을 학수고대하며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갓끈을 끊고 연회를 즐긴다는 뜻의 절영지연(絶纓之宴)은 그날 이 후 큰 어려움에서 구해주면 반드시 보답을 받는 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런가 하면 자신이 살았을 적에 베풀어준 은혜를 죽어서도 잊지 않고 갚는다는 이야기도 있다.

중국 춘추시대 진나라에 위무자(魏武子)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에게 예쁘게 생긴 첩이 있었으나 둘 사이에 자식이 없었다. 그가 병이 들어 눕게 되었다. 본처의 아들 위과(魏顆)에게 말했다.
"첩이 아직 젊어 앞길이 창창하니 내가 죽거든 다른 곳에 시집을 보내도록 해라"    

그러나 막상 병이 깊어지고 숨이 끊어지기 전에 말을 바꾸었다.

"내가 죽으면 첩도 함께 묻어라"

이 말을 들은 아들은 난감했으나 병이 깊어지면 정신이 혼미해 지므로 정신이 맑았을 때 남긴 유언을 따르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고 서모를 개가시켜 순사(殉死)를 면하게 해주었다.

훗날 진나라가 이웃 나라에게 침략을 당하자 아들 위과는 군대를 거느리고 싸움터로 향했다. 적군의 기습으로 진퇴양난의 기로에서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백발의 노인이 나타나 풀을 묶어 놓자 적장이 말을 타고 공격해 오다 거기에 걸려 넘어져 말과 함께 곤두박질 쳤다. 그는 살아남아 적의 용맹한 장군을 체포하는 전공을 세웠다. 그 노인이 누군지 궁금했지만 어디론가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그날 밤, 아들 위과 꿈에 그 노인이 나타나서 "나는 그대가 개가 시켜준 여자의 친정아버지요, 그대가 내 딸의 목숨을 살려 주었기에 그 은혜에 보답 했을 뿐이요." 하고 말했다.

그 후 결초보은(結草報恩)이란 풀을 묶어 은혜를 갚는다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우리 속담에 "뿌린 대로 거둔다."는 말이 있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착한 일을 하면 복을 받고, 나쁜 일을 하면 죗값을 치른다는 인과응보(因果應報)의 원칙을 알면서도 소견머리 없는 나는 어쩌다 티끌만큼 도움을 주고서 침소봉대하여 떠벌렸다.

아무도 모르게 허물을 덮어준 군주와 그 은혜를 목숨으로 갚으려 했던 신하의 이야기, 딸의 목숨을 살려준 은혜를 죽어서도 잊지 않고 갚았던 친정아버지의 아름다운 이야기가 배은망덕(背恩忘德)한 사람이 의인처럼 활보하는 야속한 세상을 밝혀주는 희망의 빛이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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