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 구입한 다산간찰, 연담선사와 건넨 짧은 편지
새로 구입한 다산간찰, 연담선사와 건넨 짧은 편지
  • 강진신문
  • 승인 2022.10.17 1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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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문화해설사 신영호의 강진이야기 _ 다산의 쪽지 편지의 사연
①다산박물관에서 새로 구입한 유물인 다산간찰

 

다산간찰의 해석본

 

다산간찰의 내용

 

9월 중순경 다산박물관 유물구입 자문회의 의제로 올라온 다산의 짧은 편지로 보이는 간찰이었다. 집에 와서 자료를 찾아보니 다산과 인연이 있는 연담유일(蓮潭有一,1720~1799)선사와의 만남을 짧은 편지로 주고받은 내용이었다.

이 자료는 코로나가 한창인 2020년 제31회 다산학 학술회의때 「다산과 불교」란 제목으로 비공개해 발표한 한양대학교 국문과 정민교수가 "다산과 연담유일"이란 논문으로 발표한 내용에 있는 것으로 짧은 편지의 전후 맥락을 맞춰 볼 수가 있었다.

-다산과 연담의 인연-
강진의 유배가 4년째로 접어들던 1805년 4월, 만덕사에서 혜장과 만난 일을 계기로 강진 시절 다산은 불교의 자장속에 깊숙이 빨려 들어갔다.

여기에는 아버지 정재원과 얽힌 연담유일과의 해묵은 인연의 사슬이 있었다. 다산이 16세 나던 1777년 부친 정재원(丁載遠.1730~1792)이 화순 현감으로 부임했다. 화순 인근 동림사에 잠시 머물던 연담유일이 정재원을 찾아왔다. 연담은 화순 출신 승려로 각종 불경에 대한 깊은 이해뿐 아니라 대강백(大講伯)으로도 명성이 대단했던 불교계의 큰 인물이었다.

한편 이곳 화순현의 정사당(政事堂)이 있었다. 연담은 이곳에서 어린 다산과 만나 상락주를 여러 잔 마셨다. 당시에 네 형제가 모두 내려왔다가 큰아들 정약현은 먼저 올라가고 나머지 정약전, 정약종, 정약용 세 형제가 남아서 과거 시험 준비를 했던 듯하다. 3형제 중에서 막내인 다산이 단연 두각을 드러냈다.

-임하록(林下錄) 재 편집에 얽힌 사연-
다산이 연담의 소식을 접한 것은 그로부터 24년이 지난 1802년이었다. 다산이 연담 유일과의 젊은 시절 인연과 강진으로 유배 온 뒤 그의 문집을 접하게 된 사정은 다산이 친필로 남긴 사연이 따로 있다.

다산은 1778년 아버지를 따라가서 환순 관아에 머물 당시는 마침 연담유일이 사방을 운유하다가 고향인 화순 동림사로 돌아와 잠깐 머물 때였다. 17세 소년과 59세 노승과의 나이 차이를 잊은 만남은 시를 매게로 이루어졌다. 당시 화순 관아의 금소당으로 놀러 온 연담은 다산과 근 1백 편에 가까운 시를 주고받으며 교유했다. 연담이 동림사로 돌아가면 다산은 동림사까지 쫓아가서 연담과 시문을 주고받았다.

그러다가 연담이 지리산 자락의 파은사로 떠나게 되자 처음엔 인편에 시를 지어 붙이기도 했으나 이후 둘의 인연은 끊겼다. 다산은 이때 동림사를 들락거린 인연으로 연담이 지리산으로 떠난 뒤에는 두 형님과 함께 동림사로 들어가 한 겨울을 나면서 독서했다. 다산이 쓴 「동림사독서기」에 이때의 정황이 자세히 나온다.

-다산의 강진유배-
24년 뒤인 1802년 강진동문밖 주막집에 머물 때 연담의 소식을 수소문했고 3년전인 1799년에 이미 세상을 떴다는 소식을 들었다.

연담의 시문집이 이미 간행되었다는 말에 급히 이를 구해 읽어보고는 거기에 실린 17세 소년 시절 지은 자신의 시와 부친과 주고받은 시가 나란히 수록된 것을 보고 반가운 한편 아버지 생각과 자신의 처지가 슬퍼서 울었다.

다산은 또 연담의 문도에게서 살아왔을 때 연담이 다산에 대한 얘기를 했었다는 전언도 들었다. 당시에도 3형제 중에 다산은 단연 이채를 발했던 듯하다. 연담은 넷째 도련님이 지금쯤은 틀림없이 과거에 급제 했을 것이라고 말하곤 했다는 것이다.

다만 다산은 연담의 시문집 「임하록」 5권 2책을 살펴 본 뒤 그 체제와 편집이 몹시 불만스러웠다. 교정의 오류가 적지 않게 눈에 거슬렸고 의례도 잘못된 곳이 적지 않았다. 이에 다산은 연담의 시문집을 다시 찍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워낙 비용이 많이 드는 일인데다가 유배 죄인의 말이라 하여 당장 실행에 옮겨지지 않는 것을 애석해했다. 이에 다산은 재전 제자인 완호윤우(完虎淪佑,1758~1826)에게 자신과 연담의 오랜 인연을 적은 글을 보내 자신의 이같은 뜻을 한번 더 곡진하게 전달하려고 했다.

-다산과 혜장의 만남-
1805년 4월 봄날 다산은 백련사로 마실을 나갔다가 아암혜장과 운명적인 만남을 가졌다. 그 아암은 바로 연담에게서 직접 배운 문도였다. 항렬로치면 손제자이지만 아암은 직접 연담의 해타(咳唾)에 접해 훈도를 받았다. 이후 다산은 혜장과 연담과 자신에 얽힌 이야기를 나누었고 「임하록」 편집에 대한 불만도 전달했을 것이다.

-다산의 짧은 편지 사연-
이후 다산은 「임하록」의 재편집 문제를 두고 완호윤우의 제자인 호의시오(鎬衣始悟,1778 ~ 1868)와 논의를 이어갔다.

문제의 짧은 편지는 연담의 문집 정리 작업이 지지부진하자 완호윤우가 다산에게 작업을 독촉하는 편지를 보낸 데 대해 보낸 답장으로 보입니다. 이름아래 찍힌 도장은 완호윤우가 다산에게 받은 편지에 예외없이 찍혀 있는 것으로 보아 하나의 첩에서 뜯어져 나온 편지중 하나인 것 같습니다.

편지의 수신자는 완호윤우로 보이고 특별히 의순(意恂 1786~1866)을 닦달하라고 한 것으로 보아 호의시오일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호의는 또 이런 문제로 상의할 대상도 아니었을 것입니다. 이 편지는 다산이 완호에게 보낸 편지이고 연담유일 문집 「임하록」 재 편찬 당시의 사정을 보여주는 의미있는 내용으로 보입니다. 산방에 있다고 했으니 이 편지를 쓴 것은 다산초당에서였고 그 시기는 1813년 6월 22일이었을 겁니다.

끝으로 다산은 연담의 문집 「임하록」 최종본은 수정한 재편집본이 끝내 완성될 수 없었다. 재정적인 문제로 마지막 단계에서 중단되었는지 다른 이유로 최종 간행되지 못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다산은 연담의 시문집의 재간행을 위해 백방으로 노력한 자취는 여러곳 친필 시문과 서간문속에 생생하게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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