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영랑 선생의 숨결을 지키는 노란 보물단지
[특집] 영랑 선생의 숨결을 지키는 노란 보물단지
  • 강진신문
  • 승인 2022.08.29 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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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동네 옛 이야기 - 남성리 영랑길 7]
영랑생가를 지키는 은행나무(Ⅰ)
사랑채 밖에서 바라본 은행나무

 

강진군은 오래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강진 이야기를 발굴하고 계승하기 위해 지난 2019년부터 매년 '우리 동네 옛이야기' 책을 발간하고 있다. 책 편찬에는 강진 출신 김옥애, 강현옥, 장미연 동화작가가 글로, 김충호 화백이 그림으로 참여하고 향토사학자 양광식 강진문사고전연구소장의 감수를 받았다.

올해 세 번째 펴내는 강진 이야기 동화책에는 남성리 영랑길의 역사, 문화 이야기 6편을 오일파스텔 삽화와 함께 책에 담았다.

'우리 동네 옛이야기' 남성리 영랑길 편에 가까운 옛날 실존했던 인물들과 유적에 관한 이야기를 담아내 어린이와 청소년들이 강진의 역사를 살펴보는 데도 많은 도움이 될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다.


오랜 세월을 살아오신 할머니나 할아버지와 함께 살고 있는 사람 손 한번 들어볼래? 오래 살아오신 세월만큼이나 다양한 이야기들을 알고 계시지? 때로는 눈물을 뚝뚝 흘리게 하는 슬픈 이야기도, 때로는 배를 잡고 구르게 만드는 웃긴 이야기까지 많이도 알고 계셔. 그런데 말이야. 이야기는 사람만의 것이 아닌가 봐. 깊은 산과 호수, 오래된 바위와 나무도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면 믿을 수 있겠어?

해마다 4월에서 5월이면 모란을 찾아 사람들 발길로 북적이는 곳, 시인의 마음이 늘 푸른 하늘을 우러르고 있는 곳이라면 어딘지 알겠니? 맞아. 시인 김영랑 선생님의 생가야. 다들 영랑생가하면 모란부터 떠올리기 바쁘지. 그러나 나도 모란만큼 영랑생가 사랑채에서 아주 오랫동안 뿌리를 내리고 있단다. 이제 내가 누군지 알겠니? 그래, 맞았어. 난 영랑생가 사랑채를 지키고 있는 은행나무야. 1921년에 이곳에 심어져 지금껏 자리를 지키고 있으니 참 오래도 한 자리를 지키고 있지? 올해로 얼추 100년은 넘은 것 같구나. 그러니 나만큼 영랑 선생님의 이야기를 많이 알고 있는 나무가 또 있을까? 오늘은 그중에 몇 가지만 살짝 들려줄까?

내가 이곳에 새로 뿌리 내리고 2년쯤 지났을 때였어. 늠름한 체격에 이목구비가 뚜렷한 영랑 선생님을 다시 보았지. 일본 유학 중 관동 대지진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급하게 귀국하게 되었대. 21살 앳된 청년이었던 선생님은 오랜 여행으로 지쳐 있었지만 표정만은 아주 다부져 보였단다. 며칠 여독을 푼 선생님은 강진의 젊은이들을 사랑채로 모으기 시작했어. 김현구, 차부진, 김길수 등의 젊은이들과 시 이야기로 밤낮을 보냈지. 그때 만들어낸 것이 <청구>라는 문학 동인지였다는 건 나중에 알았어.

그런데 어느 때부턴가는 처음 보는 얼굴들이 드나들기 시작했어. 안경을 낀 마른 체구의 청년부터 까만 양복을 단정하게 빼입은 청년까지 이곳 사람들로는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었어. 영랑 선생님은 그 청년들을 동지라고 부르며 버선발로 반기곤했지.

 

"어이, 용아. 유학 시절 작은 악마 같은 내 꼬임에 빠져 여기까지 온 걸 후회하지 않는가?"
영랑 선생님이 용아라고 부르는 청년은 나이가 영랑 선생님과 비슷해 보이는 차분해 보이는 청년이었어. 영랑 선생님은 목소리부터 쩌렁쩌렁한데 비해 용아 선생님은 조용하고 여린분이였지.

"그러게 말이네. 내가 왜 그때 그 유혹을 차마 떨쳐내지 못했더란 말인가? 자네처럼 난 문학이니 예술이니 하는 것에 천부적 소질도 없으면서 말이야." 용아 선생님이 겸손하게 말했어.
"엣끼, 이 사람! 누가 들으면 진실로 알겠네. 그래 그런 사람이 시심이 깊은 소리를 그리도 잘 한단 말인가? 그런 소리 말게나. 자넨 누가 뭐래도 내 마음의 소리까지 읽어내는 깊은 시심을 가지고 있네. 자네가 있어 이 힘든 세상에 얼마나 위안이 되는지 몰라."

영랑 선생님과 용아 선생님은 이런 저런 문학 얘기로 밤이 깊은 줄도 몰랐어. 나는 그런 두 분의 우정이 영원하길 바라며 노랗게 물든 은행잎 몇 장을 마루 위로 떨궈 주었단다.

사랑채가 지어지고 나서는 더 다양한 손님들이 집안을 드나 들었지. 그 중엔 이름만 들어도 '아!'하고 감탄사를 내지를 분들도 있단다. 당시 소리꾼으로서 전국에 이름을 날리던 분이 계셨어. 이름도 아름다운 임방울 명창이었지. 내가 임방울 명창을 처음 본 건 일본의 기세가 날로 하늘을 찌르고 우리나라에 대한 수탈도 더 심해져 가던 1930년대 어느 해였어.

그날은 안채를 부드럽게 감싸 안은 진초록빛 대숲 위로 파란하늘이 쨍하게 펼쳐진 10월의 어느 날이었어. 이른 아침부터 감나무 가지 위 까치들이 유난히 깍깍댔지. 걸레질을 마친 사랑채 마루는 반들반들 윤이 나고 있었어. 영랑 선생님은 사랑채 누마루에 앉아 평소 아끼시는 북을 꺼내시고 깨끗한 무명으로 정성을 다해 닦고 계셨지. 마침 그 앞을 지나가던 선생님의 아버님께서 못마땅한 듯 한마디 하셨지.

"흠. 사대부가 자손이 악기를 만지는 건 모양새가 별로 좋지 못한 듯 하구나,"
그러자 영랑 선생님은 예의는 차리되, 뜻을 굽히지 않고 대답하셨어. "임방울 명창이 어떤 분입니까? 최고의 소리꾼을 모시는데 손수 북장단이라도 넣어드려야 예가 아니겠습니까?"

그도 그럴 것이 영랑 선생님은 문학에도 조예가 깊으셨지만 북이며, 대금이며, 거문고며 음악에도 뛰어난 재능을 보이셨거든. 아버님은 분명한 까닭을 들어 대답하는 아들의 말에 더 이상 아무 말이 없이 사랑채 마루를 지나가셨어. 아들이 음악을 너무도 좋아한 것을 알기 때문이었지. 악기와 소리를 좋아해서 음악에 취해 있는 아들이 걱정된 아버지는 음악 공부를 한다면 유학자금을 대지 않겠노라고 으름장까지 놓으셨지.

그러나 영랑 선생님 가슴 속 열정은 쉽게 꺼지질 않았어. 유학 시절엔 잠시 주춤하였지만 한번 터진 열정은 쉽게 식히기 힘든 것이었나봐. 선생님은 평생 북을 안고 사셨거든. 아마 그래서인가봐. 선생님의 시 속엔 북소리가 두둥 울리고 거문고 가락이 땅 따당 흐르지. 영랑 선생님의 시를 읽어 본 사람이라면 이 말에 다 공감할 수 있을 거야.

오후가 되자 고소한 기름 냄새가 퍼지고 집안 분위기는 풍선처럼 부풀어 올랐어. 그리고 새로 지은 사랑채 토방(방에 들어가기 전 마루나 문 앞에 좀 높이 평평하게 다진 흙바닥)은 크기가 다른 손님들의 신발로 수북히 덮였지. 그리고 드디어 하얀 두루마기를 정갈하게 차려입고 손에는 쥘부채를 쥔 그분, 임방울 선생님이 모습을 드러냈단다.

두둥 탁! 영랑 선생님의 북장단에 춘향전의 한 대목 쑥대머리가 시작되었지. "쑥~대~~머리~~~ 귀신 형~용~~"

순간 그 많은 사람들의 수런거림이 찬물을 끼얹은 듯 싹 가라앉았어. 그 시절은 우리나라를 일본에 빼앗겨 숨 한 번 제대로 쉬기 힘든 때였거든. 그래서 임방울 님의 소리에는 가슴을 에일 것 같은 한이 배어 있었단다.

"적~막~옥~방의 찬 자리에~~ 생각나~는 이 임뿐이라~~~"
사랑채 얕은 담 너머로 건너다 보던 여인들 중엔 일찌감치 소맷자락으로 눈물을 훔치는 이도 있었어.

"세상에! 여기가 춘향이가 갇힌 차가운 옥 같구만……."
"그러게 말예요. 한양 간 이몽룡은 어쩌자고 소식 한 통 없을까요잉?"
"소식 없는 임이 어디 이몽룡 뿐이겄어?"
"그게 무슨 말이란가?"
"우리에게 와야 할 임이 독립 말고 뭐가 있겄는가?"
어디선가 조용하고 나직한 음성이 말했어요. "쉿! 조용히 해요. 저쪽 구석에 순사들 기웃대는 거 안 보이요?"

누군가 또 주의를 주는 소리에 수군거림은 쥐 죽은 듯 가라 앉았어. 그래, 맞아. 임방울 선생님은 식민지 시절 억눌려 있던 우리 민족의 설움을 '쑥대머리'로 달래주었던 거야. 편지 한 장 없는 님인 이몽룡을 기다리며 차디찬 옥 안에서 눈물짓던 춘향의 심정이 기약 없는 독립을 기다리며 탄압받던 우리 민족의 설움과 비슷했기 때문이지. 그래서 '쑥대머리'가 인기를 끌수록 일본 순사들의 감시도 심해졌어. 결국 임방울 선생님도 18세 때의 영랑 선생님처럼 옥에 갇혀 고문을 받기도 했단다. 식민지 상황은 그렇게 우리 예술인들을 쑥대머리의 춘향이로 만들어버리기도 했지.

임방울 선생님의 소리가 영랑 선생님에게도 깊은 감흥을 심어준 걸까? 어느 땐 서글픈 표정으로 감나무 밑을 거닐었어. 그러다 또 어느 땐 아이 같은 천진난만한 얼굴로 대문을 나서 탑동 윗샘(지금은 없어졌지만 1900년대 중반까지도 남아있던 마을 공동 샘터)에 한참을 앉아 있곤 했어. 그리고 감흥에 가득찬 얼굴로 하늘을 우러러 보곤 했단다. 그러고 뭐라 뭐라 혼자 중얼거리기도 했지. 잘은 기억이 안 나지만 아마 이렇게 읊조렸던 것 같기도 해.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같이
풀 아래 웃음짓는 샘물같이
내 마음 고요히 고흔 봄길 위에
오늘 하루 하늘을 우러르고 싶다.

선생님은 또 밤이면 잠을 못 이루고 서글퍼 하실 때가 많았어. 나는 그런 선생님을 보며 걱정이 되었단다. 또 어느 때는 한동안 먹먹한 표정으로 한나절 뜰을 바라볼 때도 있었지. 그러고 나면 사랑채 큰방에선 늦은 밤까지 불빛이 새어 나오곤 했어. 그러던 어느 해였어. 용아 박용철 선생님이 오랜만에 영랑 선생님을 찾아왔어. 용아 선생님은 서류 봉투에 무언가를 소중히 싸서 가지고 왔어.

"어이, 영랑! 여기 자네의 고뇌의 흔적을 가지고 왔네."
"고뇌의 흔적이라니? 무슨 말인가?"
용아 선생님은 어린아이 앞에 사탕을 내놓듯 보란 듯한 표정을 지었지.
"하하! 이것이 자네의 고뇌가 아니면 뭐란 말인가?"
용아 선생님은 서류 봉투 안에서 보물처럼 작은 책 하나를 꺼냈어.
"이게 벌써 나왔단 말인가?"

영랑 선생님은 조심스레 그 책을 받았어.
"벌써부터 반응이 뜨겁다네. 이러다가 자네가 날 모른 체하지나 않을지 모르겠네."
박용철 선생님은 껄껄 웃으며 농담을 했지.
"아이구, 이 사람! 실없기는……."

용아 선생님이 가신 뒤로 영랑 선생님은 그 책을 손에 들고 내게 다가왔어. 그리고는 혼잣말처럼 내게 말을 거는 거야. 나는 그때까지도 아직 어린 나무라 손님들도 눈여겨 봐주질 않았어. 그런데 선생님이 내게 말을 걸어주니 너무도 설레어서 가슴이 콩콩콩 뛰지 뭐야.
"허 참! 신기하구나."

선생님이 내 발치 아래 놓인 의자에 앉으며 하는 말이었지.
"이게 내 고뇌의 흔적이라면 믿겠느냐?"
나는 바람 끝에 여린 가지를 맡겨 선생님이 내민 책을 만져 보려고 했지. 그것이 선생님이 내신 첫 시집이라는 건 나중에 알았단다. 선생님의 영혼의 벗인 용아 박용철 선생님과 영랑 선생님이 힘을 모아 시문학사라는 출판사를 내고 <영랑 시집>을 출간한 것이었지. 선생님은 촤르르 책장을 넘겨 한 페이지를 펼치더니 내게 조용히 시 한 편을 낭송해주었어.

"내 마음 아실 이 내 혼자 마음 날 같이 아실 이~~"
무슨 말인지는 잘 알 수 없었지만 선생님이 오직 나를 위해서만 선생님의 시를 낭송해주는 것만 같아 정말 감격스러웠지. 그 뒤로도 영랑 선생님은 종종 선생님의 시와 함께 다른 선생님들의 시도 들려주었어. 난 그 아름다운 시들을 들으며 둥치를 키우고 하늘 향해 가지도 더 쭈욱 쭉 뻗어 올렸단다. 그땐 이런 생각도 했어.

'아! 나만큼 행복한 나무가 또 어디 있을까? 이렇게 아름다운 시들을 들으며 자랄 수 있는 나무는 아마 나밖에 없을 거야.'

1938년은 영랑 선생님께는 잊을 수 없는 해였어. 평소 몸이 좀 약하던 용아 선생님이 그 해엔 오랫동안 앓아 온 결핵으로 더 고생하고 있었어.

"이보게, 용아. 자네 요즘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닌가? 시문학 창간에, 내 시집 창간에 쉴 새 없이 달려오느라 몸을 너무 혹사 시킨 것 같아."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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