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혈암, 고려시대 불교성지 국가문화재로도 부족함이 없다
용혈암, 고려시대 불교성지 국가문화재로도 부족함이 없다
  • 강진신문
  • 승인 2022.08.22 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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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문화해설사 신영호의 강진이야기 _ 도암면 용혈암

 

용혈암은 강진군 도암면 덕룡산 남동쪽 산자락에 있던 고려 때 암자 터이다.

이 곳은 지금은 참죽 덤불로 뒤덮인 빈터에 지나지 않지만 고려 때 빛나던 한 시절에는 백련사 2대 정명국사 천인(天因)스님이 이곳에서 입적하였다. 4대 진정국사 천책 스님과 7대인 진감국사 정오스님이 오랫동안 머물러 당시 스님을 뵙기 위해 조정 고관들의 수레가 줄을 잇던 고려 불교의 빛나던 성지였다.

강진은 무위사와 도갑사 월남사 등 유서 깊은 사찰과 고승들이 진작부터 자리를 잡아 뿌리를 내렸던 고려 불교의 못자리였다. 여기에 1208년 원묘국사 요세가 월출산의 약사난야(藥師蘭若)에 처음으로 자리 잡고, 2~3년 뒤인 1211년 강진의 신사(信士) 최표(崔彪)와 최홍(崔弘), 이인천(李仁闡) 등이 힘을 합쳐 만덕사를 창건하여 당우(堂宇)가 서면서, 1216년에 원묘국사를 만덕사로 모셔왔다. 

이를 계기로 이른바 백련결사가 형성되어 송광사의 정혜결사와 함께 고려 불교의 양대 축으로 성장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이후 요세는 1245년 여름, 절의 일을 맏상좌 천인(天因)에게 맡기고 별원(別院)으로 물러나 입적하였다.

용혈암이 언제 처음 건립되었는지는 기록으로 남은 것이 없다. 다만 천인이 당시 용혈암에 머물며 ≪법화경≫을 사경하던 서상인(誓上人)에게 보낸 시가 있는 것으로 보아 용혈암은 1대인 원묘국사 요세 당시에 조성되어 백련사 승려들이 들어가 용맹정진하던 수행처 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를 이어 만덕사 2대 정명국사 천인은 만년에 이곳에서 머물다 입적하였다. 이후 4대 진정국사 천책이 이곳에 머물게 되면서 용혈암은 비로소 세상에 크게 알려졌다. 백련결사에 입사(入社)를 청하는 조정 고관들이 서원이 잇달았고 진정국사에게 가르침을 청하려는 고관들의 수레가 잇달아 산 속 암자로 몰려들었다. 이후 이곳은 대단히 비중있는 종교 공간으로 탈바꿈하였다.

이렇게 볼 때 용혈은 진정국사 천책으로 대표되는 공간이다. 천책을 용혈대존속이란 칭호로 부르는 것만 보더라도 알수가 있다. 이후 다시 진감국사 정오가 이 곳에 3년 간 머물렀고 그 뒤 다시 용혈암 위쪽 골짜기에 퇴락한 쾌탑암을 보수하고 능허대와 초은정 등 부속 건물을 지으면서 그 공간이 한층 확장되었다.

이곳에는 용혈(龍穴)로 불리는 용굴이 있었고, 용굴 속에는 이무기가 산다는 연못이 있다. 그리고 그 이무기가 굴 천장 쪽으로 10여미터 이상 뚫고 승천했다는 통천혈(通天穴)이 지금까지 신비한 모습 그대로 남아있다. 이 영험한 공간은 통천혈의 기묘한 현상만으로도 신앙의 대상으로 되기에 충분했다.

용굴 안에는 감실을 꾸며 부처님을 모셨고 각종 부속 건물들이 차례로 들어서면서 용혈암은 상당한 규모를 지닌 사찰의 구성을 이루게 된 듯하다. 용혈아래쪽에는 암자터로 닦은 평지 유구옆에 땅굴이 하나 더 있다. 2014년의 발굴은 실제 상부의 용굴이 아닌 아래쪽 땅굴과 그 앞의 건물지만을 대상으로 진행 되었다. 이후 용혈암은 5백년이 훌쩍 넘은 세월 동안 사람들의 뇌에서 까맣게 잊혀 사라졌다. 터는 잡초에 매몰되고 아무도 그 존재를 알지 못했다.

그러다가 근 700년만인 1800년 초반 인근 만덕산에 유배객으로 머물던 다산 정약용에 의해 이 공간은 새롭게 주목되어 덤불 속에 묻혀있던 찬연한 옛 역사가 되살아났다. 다산은 강진 유배지에서 만나 교유를 나눈 아암 혜장을 통해 과거 이곳에 머물렀던 만덕사 4대 진정국사의 시문집  「호산록」을 구해 읽었고 그에게 깊이 매료되었다.

그는 천책의 향기를 찾아 해마다 봄철이면 다산초당의 제자들을 이끌고 이곳으로 소풍을 오곤 했다. 이후 아암 혜장의 부탁에 따라 그의 사후  「대둔사지」와 「만덕사지」를 편찬할 때 다산은 의욕적으로 만덕사와 용혈암의 자취와 이곳을 거쳐간 고려 8국사의 흔적을 복원해서 수미를 갖춘 기록으로 남겼다. 이 과정에서 용혈에 대해 상당한 비중을 둠으로써 용혈은 불교사 정리 작업의 연관속에서 비로서 그 실체를 세상에 드러낼 수 있었다. 용혈암의 역사와 관련 종합하여보면 먼저 용혈관련 기록은 다양한 경로로 남아있다.

첫째, 다산 정약용이 자신의 문집 등에 남긴 용혈관련 시문이 있다. 둘째, 「호산록」과 「동문선」 등의 기록에 수록된 연관 내용들이 대단히 많다. 셋째, 「만덕사지」와 「대둔사지」 등 불교 관련 기록에 남은 관련 기록이 있다. 넷째, 그 밖의 문집 자료에 산견되는 용혈관련 유물 또는 역사에 관한 시문들이 존재한다.

이렇게 모으면 그 기록들이 생각 밖으로 풍부하고 다양하다. 이제 이 기록들을 차례로 살펴서 용혈암에 관한 각종 기록을 한자리에 모아서 이를 통해 용혈암 복원과 문화공간으로 활용 가능성을 검토 해야한다. 한편 지난 발굴을 통해 이곳에서 수습된 청자 부처와 나한 보살상의 파편을 보면 절과 굴 안에서 청자불상과 보살상 나한상을 모셔 둔 상당한 규모였고, 대단한 광엄을 갖춘 격조 높은 사찰이었음이 드러난다. 용혈암지가 있는 절벽 뒤편에는 만덕광업이 1988년 이래로 광산을 운영하고 있다.

 

이미 30년을 넘게 광산을 운영해 용혈암 산자락 반대 편에서 2km가량 굴을 파고들어 채광하고 있어 환경 파괴와 분진 소음 등의 문제가 지속적으로 제기되어 왔다. 이에 2011년 11월에 백련사측과 강진 향토 사학자 문화전문인들이 용혈암 보존협의회를 발족하고 용혈암터 복원추진 추진위원회를 정식 창립대회(공동위원장 김대용 신영호)가 강진아트홀에서 있었다.

이후 백련결사에 대한 학술세미나가 매년 개최되었고 고려국사의 불교 성지인 용혈암을 복원해야 한다는 청원이 지속적으로 계속되었다. 2012년 4월 12일에는 강진군 불자와 군민 100여명이 함께 참여한 「진달래 길 따라 용혈암까지」의 행사가 당시 백련사 주지 여연 스님의 주관으로 개최되기도 하였다.

2012년 12월 29일에는 용혈암 복원 추진위원회의 주도로 만덕광업 광권허가 불허 운동과 제2차 반대 서명 운동이 진행되었다. 그 결과 2013년 2월 5일 만덕광업 분진 소음 피해조사 민관 합동 조사 발대식이 개최되기도 하였다.

이 같은 보존의지가 결집되어 용혈암자터가 2012년 6월 14일 강진군 향토 문화유산 제 47호로 지정되었고 2013년 2014년 정밀지표조사와 시군 조사 및 발굴 조사 2019년 문헌 조사를 실시하여 역사현장과 기록 유산이 실증적으로 확인되었다.

용혈암 복원 추진위원회에서는 만덕광업과 여러 차례 현장 조사와 협의 한 결과 2022년 12월 31일까지 만덕광업이 가지고 있는 광권 등을 강진군에 자진 반납하겠다는 공증(광주 지방 검찰청 장흥지청)을 하였습니다.

우리는 그동안 10년의 시간을 통하여서 올 년 말을 학수고대 기다려 왔습니다. 그런데 만약 만덕광업이 편법을 써서 우리를 기만한다면 강진군의 모든 불자들과 강진군 환경보호단체 용혈암 복원추진위원회, 강진군 문화단체는 분연히 일어나 만덕광업과 전면 투쟁할 것입니다. 또 강진군에서는 용혈암을 강진군 향토 문화 유산에서 전라남도 문화재로 지정해 줄 것을 상신해 놓고 있는 실정입니다. 고려시대 불교의 성지 용혈암 복원하여 국가문화재를 만들 것입니다.

강진군민 모두가 관심 가져주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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