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고구마 생각
[기고] 고구마 생각
  • 강진신문
  • 승인 2017.10.15 19:3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김제권 ㅣ 수필가·도암면 출신

시대의 흐름은 모든 것을 바꿔버린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아랫배가 불룩 나온 사람이 사장님 대접을 받았던 시절이 있었다. 밥상에 윤기가 좔좔 흐르는 쌀밥에 매끼 올라오는 고깃국은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요즘은 탄수화물과 지방이 비만의 주범이라며 고량진미(膏粱珍味) 음식으로 인기를 누렸던 쌀과 육류가 홀대 받고 있다.
 
반면에 쌀과 보리의 하급대체재에 불과 했던 고구마에 식이섬유가 다량 함유되어 항암 효과와 고혈압에 효능이 좋다하여 다이어트 식품으로 각광을 받으며 몸값도 하늘높이 치솟았다.
 
고구마에 얽힌 추억은 애잔하다. 지금은 종류가 다양해 졌지만 내가 어렸을 적에는 생산량이 많은 호박고구마를 심어서 간식으로 활용했다.
 
소쩍새 우는 봄이면 아버지는 식솔들의 헛헛한 뱃구레를 채워주기 위해 지게를 짊어지고 고구마 밭이 있는 가파른 언덕을 수없이 오르내렸다. 허리를 구부린 채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종아리에 송골송골 맺힌 땀방울이 툭툭 불거진 근육을 타고 흘러 내렸다. 가족의 생계를 짊어진 가장의 고독한 행진이었다.
 
땡볕아래 낮은 포복으로 도랑을 점령한 고구마 잎줄기는 영양분을 흡수하여 탐스럽게 영글어 간다.
 
추운 날 온돌방 윗목에 저장해둔 고구마를 꺼내어 쇠죽솥 잔불에 넣었다가 껍질을 벗기면 노릇노릇한 살결에서 모락모락 김과 향이 피어오른다. 형제들 몰래 먹느라 단숨에 꿀꺽 삼켜버리면 달콤한 맛을 느끼기도 전에 창자가 뜨거워서 몸을 흔들어대곤 했다.
 
어머니는 고구마를 넣은 가마솥에 생솔 잎에 불을 지피면 솥뚜껑 틈새로 거품을 뿜어내면 대나무 소쿠리에 담아 처마 밑에 걸어 놓는다.
 
호롱불을 켜고 살았던 농촌마을의 겨울밤은 너무 길고 지루했다. 어둑한 방 한쪽 구석에 놓인 호롱등잔에 불을 켜면 형제들은 머리를 맞대고 시나브로 커져가는 불꽃을 바라본다.
 
새벽녘 배고파서 뒤척거린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캄캄한 천정을 향해 누운 채 두런두런 이야기를 했다.
 
다른 형제들도 이불 속에서 귀를 쫑긋 세우고 있다가 "내 새끼 벌써 일어났는가?" 하면 여기저기서 두더지처럼 일어났다. 어머니가 고구마 소쿠리를 가져오시면 동그랗게 둘러앉아 허겁지겁 먹는 나에게 "체하니까 천천히 먹어라" 하시며 동치미 그릇을 건네주었다.
 
차가워진 몸을 데우기 위해서 이불속으로 들어가 형제들은 몸을 비비고 발바닥에 간지럼을 태우며 낄낄거리다 다시 잠이 들었다.
 
우리는 인류의 첫 장수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지난 날 천덕꾸러기였던 고구마가 다이어트 건강식품으로 귀한 대접을 받고 있으니 기분이 좋다.
 
어린 시절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해 쌀 대신 지겹도록 섭취했던 고구마의 효능이 몸속에 축적되어있기에 평생 건강하리라는 기대로 살아간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