玄鳩(검은 비둘기)는 순수한 시문학파 동인이었다
玄鳩(검은 비둘기)는 순수한 시문학파 동인이었다
  • 김철 기자
  • 승인 2016.11.05 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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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사에 소외된 시인...영랑선생과 같은 선상 평가 받아야

백마강 나룻터에서 지인들과.(오른쪽 두번째가 현구)
▣ 글싣는 순서
1. 현구선생은 누구인가
2. 검은 비둘기 현구선생을 찾다
3. 후손들이 보는 현구선생
4. 현구선생 알린 신석정
5. 후손들이 이어가는 현구선생과 신석정
6. 역사속 현구를 찾아내다.
7. 감성여행 콘텐츠, 현구선생

현구는 1904년 강진에서 태어나 1950년 6.25 참화로 세상을 떠난 아직도 우리에게 다소 낯선 시인이다. 1930년 '시문학'을 통해 등단했고 시문학파의 중요한 일원으로 활동하면서 85편이라는 주목할만한 시를 남겼지만 비슷한 시기에, 같은곳에 태어나, 줄곧 같은 곳에서 살며, 같은 동인지로 등단하고 또한 같은 동인으로 활약했던 영랑 김윤식이 한국현대시사상 김소월과 더불어 최고의 서정시인으로 평가되고 있음에 반해 현구는 살아 생전 이렇다할 평가를 받아보지 못했고 더욱이 시집 한권도 내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매우 불운한 시인이다.

처음 현구선생을 세상에 알린 목포대 김선태 교수는 현구선생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다. 아직도 지역주민들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현구선생에 대해 하나씩 소개하는 시간을 갖는다. /편집자주
 
시문학파기념관 김선기 관장 등의 논문을 보면 현구선생은 1904년 11월30일 강진군 강진읍 서성리 179번지에서 아버지 김노식과 어머니 김광자 사이의 5남4녀중 셋째아들로 태어났다. 집안은 할아버지때까지 벼슬을 이어올 정도로 명문 관료 집안이었지만 1910년 한일합병을 거치면서 송사에 휘말려 급격히 가산이 기울기 시작했다고 밝히고 있다.
 
당시 현구선생 형제들은 의협심이 강하고 예술적 재능이 뛰어난 것으로 나타난다. 장남 현봉은 강진의 독립운동가 26인중의 한사람이고, 2남 현상은 영암에서 교편생활을 거쳐 목포에서 한독당 당원으로 정치활동을 한다. 3남 현구는 문학, 쌍둥이인 4남 현석과 5남 현종은 각각 음악과 회화에 조예가 깊었다.
 
현구선생은 보통학교에 압학하기전 관서제에서 한문을 배웠고, 1911년 강진보통학교에 입학했으나 1년을 마치고 중퇴한후 재입학해 1918년 졸업했다. 1920년 배제학당에 입학했으나 자퇴하고 강진에 내려와 북산(현재 보은산)의 병풍바위, 비둘기 바위 등에서 시를 쓰기 시작한다. 이 시기에 김영랑, 차부진 등과 함께 '청구' 문학모임을 결성해 동인지를 발간하기도 한다.
 
1927년 25세 나이에 해남출신 홍충덕과 결혼한 현구선생은 슬하에 3남6녀를 두었다. 현구선생은 1930년 5월 시문학 2호에 '님이여 강물이 몹시도 퍼렀습니다'를 비롯한 4편의 시를 발표하면서 시단에 나오게 된다. 이후 문예월간과 문학지에 총 12편의 시를 발표하는 등 활발한 시단활동에 나섰다.
 
1934년 강진읍 서성리 214번지로 분가한 현구선생은 생계를 위해 강진읍사무소에 들어가 사망할때까지 공직생활을 하게 된다. 1934년 시문학파가 해체의 기로에 놓이자 현구선생은 문학 3호에 '山 비둘기 같은'을 마지막으로 시단활동을 접고 강진에서 칩거한다. 1950년 10월 3일 6·25 전쟁중에 공산당 프락치에 의해 46세의 나이로 죽음을 당한다. 생전 세차례의 시집 발간기회가 있었으나 모두 무산됐다. 사후 20여년이 지난 1970년 유족과 현구기념사업회가 중심이 되어 현구시집을 출간했다. 이 유고시집은 생전의 남긴 85편의 시가 수록됐다.
 
현구선생은 시집도 발간하지 못하고 잊혀진 시인이 됐을까. 목포대 김선태 교수는 이를 3가지로 압축했다. 먼저 지나친 결백성과 자족적인 시적 자세를 꼽고 있다. 자신을 비하하거나 자신의 시에 대해 스스로 폄하하는 습성이 있다는 것이다. 이런 생각이 시골에 묻혀 시를 쓰게 했다.
 
두 번째는 시집 간행을 약속했던 용아 박용철의 와병에 이은 죽음이다. 현구의 시집을 시문학사에서 발간하려 했으나 용아의 와병으로 묻혀버리게된 결정적 원인이다. 마지막으로 발표한 작품편수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공식적으로 문예지에 발표한 시의 편수는 총 12편, 같은 기간 영랑선생이 37편을 발표한 것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적다.

이런 이유로 현구선생은 알려지지 못하고 세간에 묻히게 된 것이다. 하지만 현구선생은 김영랑, 박용철과 함께 시문학파의 한사람으로 충분한 역사성을 갖는다고 본다. 이제는 시문학파의 일원으로 현구선생을 돌아봐야한다.<계속>

1940년 경주 분황사에서 문우들과 기념촬영.(오른쪽에서 두번째가 현구, 맨 왼쪽 영랑)

 

■ 현구 선생 연보
1904.11.30 강진읍 서성리 179번지 김노식과 김광자의 3남으로 출생
1911 강진보통학교 입학, 1학년 마치고 중퇴
1918 재입학후 강진보통학교 졸업
1920 배재학당 입학
1921 배재학당 그만두고 강진에서 시작(詩作) 생활
1923 홍충덕과 결혼
1930 시문학2호 '임이여 강물이 몹시도 퍼렇습니다' 등 4편발표 등단
1931.10 시문학 3호 '황혼' 등 4편 발표
1931.11 문예월간 창간호 '물위에 누워서' 발표
1933.11 문학 창간호 '내 마음이 사는 곳' 발표
1934.2 문학 2호 '길' 발표
1934 강진읍 서성리 214 분가
1934 문학 3호 '山비둘기 같은' 발표
1936 용아 사망으로 현구시집 발간하지 못함
1950.10.3 공산당 프락치에 의해 죽음을 당함
1970 유족과 현구기념사업회에서 유고집 현구시집 출간
1992 현구시집 재판
1992.11.20 군도서관 정원 현구시비 건립

현구 대표시

님이여 강물이 몹시도 퍼렀습니다<시문학 2호 1930. 5>

한숨에도 불려갈 듯 보-하니 떠있는
은빛 아지랑이 깨어 흐른 머언 산둘레
구비 구비 놓인 길은 하얗게 빛납니다
님이여 강물이 몹시도 퍼렀습니다

헤어지 섬돌에 떨든 해살도 사라지고
밤빛이 어슴어슴 들우에 깔리여갑니다
홋홋달른 이얼골 식혀줄 바람도 없는 것을
님이여 가이 없는 나의 마음을 아르십니까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아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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