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정수사 나한전 조성 목조석가여래좌상과 16나한상
[1]정수사 나한전 조성 목조석가여래좌상과 16나한상
  • 문화부 기자
  • 승인 2003.06.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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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선일<청자박물관 학예연구사>
▲ 최선일 학예연구사

  고려청자를 제작한 가마터가 분포되어 있는 대구면 용운리 항동에 위치한 정수사는 호남좌도금릉현천태산정수사여지승람(湖南左道金陵縣天台山淨水寺輿地勝覽) (양광식 역, 정수사지(淨水寺志), 강진문헌연구회, 1995)에 의하면 통일신라후기 도선국사에 의하여 창건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창건시기를 증명해 줄 수 있는 유물이 현존하지 않아 창건에 대해서는 단정지을 수 없는 실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후기 정수사는 고금도(古今島)에 있던 관우묘를 관리하는 사찰로 선정되어 대규모의 사세(寺勢)를 가졌던 사찰임을 알 수 있다. 현재 사찰은 대웅전과 나한전을 비롯한 몇 개의 전각으로 이루어져 있고, 대한불교조계종 22교구 대둔사의 말사이다. 이 사찰의 성보문화재(聖寶文化財)는 대웅전(지방문화재 제101호), 삼존불상, 괘불, 16나한상 등이 있다.
 

 그 가운데 나한전에 봉안된 16나한상 등은 1990년대 복장조사를 통하여 제작년도와 발원자 등을 알 수 있어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188호로 지정된 옥련사 대웅전 봉안 목조석가여래좌상과 같이 조선후기 정수사 나한전에 조성된 유물이다. 목조석가여래좌상이 강진읍 덕남리 옥련사로 옮겨간 시기는 한국전쟁 기간이라고 한다.

발원문을 통하여 1684년 목조삼존불상과 16나한상 등 총 23구를 조각승 색난(色難) 등이 제작하였음을 알 수 있기에 목조보살 2구와 아난?가섭존자는 없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목조석가여래좌상은 높이는 86㎝인 조선후기 중형불상으로, 상반신을 약간 앞으로 숙이고 앉아있다. 수인(手印; 손의 자세)은 오른손을 촉지인(觸地印)하고, 왼손은 다리 위에 가지런히 놓은 채 손바닥을 펴서 중지와 약지를 엄지와 맞대었다.

신체와 따로 제작된 왼팔에 “석가(釋迦)”라는 묵서(墨書)가 남아있어 불상의 명칭을 확인할 수 있다. 머리의 나발(螺髮)은 촘촘하고, 육계 표현이 명확하지 않으며, 원통형의 정상계주와 이마 위에 반원형의 중앙계주가 큼직하게 표현되었다. 불상이 걸친 옷의 표현은 변형된 우견편단(右肩偏袒)으로 대의 한 끝은 어깨부분에서 한 번 접혀져 오른쪽 어깨를 덮고 팔꿈치 뒤로 넘어가고, 다른 끝은 왼쪽 어깨를 완전히 덮고 내려와 복부에서 활짝 펼쳐져 결가부좌한 다리에 늘어져 있다.

16나한상은 모두 바위 위에 결가부좌, 반가좌, 유희좌의 자세로, 해태와 코끼리, 뱀 등을 잡거나 경전을 들고 있다. 나한상이 걸친 옷은 장삼 위에 가사로 왼쪽 어깨를 덮은 방식은 동일하지만, 속에 내의를 입은 상과 그렇지 않은 상으로 구분할 수 있다. 특히, 대부분의 나한상이 앉은 바위를 가사 끝자락이 늘어져 좌우 대칭을 이루고 있다.

그 가운데 본존상을 중심으로 오른쪽 3번째 한 손을 목뒤로 넘겨 등을 긁으며, 입을 벌려 웃는 나한상은 조선후기 불상이나 불화 등에 자주 등장하는 제14존자 벌나파사(伐那婆斯)로, 법주기(法住記)에 가주산(可住山)에 살면서 1,400명의 아라한을 거느린 나한으로 언급되어 있다.   

 이 정수사 나한전 불상을 제작한 색난스님은 1684년 정수사 나한전 목조석가여래좌상과 16나한상, 1689년에 목조삼존불감(일본 쿄토 고려미술관 소장), 1694년에 화순 쌍봉사 대웅전과 극락전 봉안 목조불상, 1700년에 해남 성도암 조성 나한상(영암 축성암과 미국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소장)을 제작한 조각승(彫刻僧)이다. 따라서 1684년에 정수사 나한전에 조성된 불상들이 비록 본존과 16나한상이 다른 사찰에 봉안되어 있지만, 17세기 후반 불교조각사에서 기준 작품이기에 보존이나 관리가 지정된 본존과 16나한상이 동일하게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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