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고려청자의 기원
특별기고-고려청자의 기원
  • 강진신문
  • 승인 2002.08.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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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용이<원광대학교 교수>
청자는 한국을 대표하는 문화유산의 하나로 세계에 널리 알려져 있는 도자기이다. 청자가 지닌 갓맑은 비취색의 유색과 유려한 곡선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형태, 그리고 고려 특유의 흑·백 상감기법으로 시문된, 무늬의 아름다움으로 많은 사람들의 경탄의 대상이 되어왔다.
고려청자의 제작은 970~980년대인 광종·성종 연간에 고려의 제도·문물이 중국의 제도·문물을 배우기 시작하던 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려의 신지배층은 중국의 청자를 매우 좋아하였고, 그들의 많은 수요에 비해 수입은 한정되었으므로 그로 인한 부족에 따라 고려청자의 제작을 요구하게 되었다. 그 당시 중국에서 청자제작지로 유명했던 오월국과의 교류를 통해 처음에는 수입품으로 만족하였다. 그러다가 978년 오월국이 북송에 망하면서 월주요의 도자장인들이 중국 각 지역으로 흩어져 각 지역의 청자 제작이 새롭게 시작되었고, 이 무렵 전후에 고려에서는 청자를 제작하고자 하는 열망이 있었으므로 이들에게 후한 대접을 제시했을 것이다. 그에 따라 월주요의 도자 장인들이 고려를 오갔을 것이며, 이들에게서 고려의 도기 장인들이 청자제작을 배웠을 것이다.
고려의 신지배층과 관계가 깊은 서해안가에 청자 제작지를 물색하게 되었고 그에 따라 서산, 시흥, 고양, 용인, 평천, 봉천, 강서 등이 선정되었다. 그 당시 중국 월유도와 같은 벽돌가마와 가마 용구로서 갑발, 갑발받침을 사용하여 청자완, 청자호를 제작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초기의 시도는 제작 기술의 미숙으로 인해 수많은 실패를 거듭하게 되며, 실패로 인한 거대한 퇴적층의 흔적이 남아 있다.
이러한 사실들은 다음의 자료를 통해 알 수 있다.
월주 비색청자의 제작으로 유명한 오월국의 월주요는 그 질이 그 당시 절정에 달해 선망의 대상이 된 곳이었으나, 중국을 통일한 북송에 의해 978년에 멸망하면서 급격히 쇠퇴하고 월주요의 기술이 이때를 전후하여 중국 남북방으로 확산되어 각 지역에서 이와 유사하거나 그 지역의 특색이 있는 청자들- 용천요의 청자, 요주요의 북방청자, 경덕진요의 초기 청자-이 제작되게 된다.
고려에서는 이 시기를 전후로 하여 월주요의 청자 장인들을 후한 대접으로 데리고 와 당시 청자의 제작을 갈망하고 있던 고려의 신지배층의 요구에 따라, 고려 도기를 제작하던 정인들에게 청자 제작의 기술을 가르쳐 주었을 것이고 그러한 초기에는 기술의 미숙으로 수많은 실패를 거듭하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1984년, 87년, 88년에 걸쳐 호암미술관이 발굴 조사한 용인 서리의 가마터 조사결과로서, 퇴적층의 크기가 80×50m,
높이는 6m에 달하는 큰 규모이다. 구릉 가운데 골에서 발견된 가마는 최하층에서 폭 1.8m, 길이 40m의 벽돌가마로 7×15×32cm 크기의 회흑색 벽돌로 축조된 가마였으며, 그 위에 83m의 진흙 가마가 올려 있었다.
이와 함께 주목되는 것은, 이화여대 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청자 항아리로 굽 안바닥에 '순화(淳化) 4년(993) 계사(癸巳)년 태묘 정1실 향기, 장인 최길화가 만들었다.'라는 음각 명문이 새겨진 청자의 예가 남아 있어 고려청자의 제작이 10세기 후반 광종·성종 연간에 제작되었음을 확실히 뒷받침해 주고 있다.
한국과 일본의 학자들은 1970·80년대에 햇무리 굽완을 근거로 중국 월주요 청자와 한국 강진가마에서 만들어진 청자와의 관련성을 지적하여 그 제작시기를 9세기 전반, 9세기 후반, 10세기 전반으로 비정하고 있다.
이에 대해 필자는 <고려도자의 변천>에서 고창 용계리 가마터와 용인 서리 가마터의 발굴조사 결과를 근거로 청자의 기원은 10세기 후반 광종·성종 연간에 고려 지배층의 요청으로 중국 오월국의 월주요 기술을 받아들여 청자의 제작이 시작되었으며, 햇무리굽 청자완은 다완의 하나로 차의 보급이 보편화되는 11세기 전반에 고려 사회의 요청에 따라 제작되기 시작하였고, 그 근거로 '순화 4년(淳化 四年,993)명의 청자호와 태평 임술 2년(太平 任戌 二年)명의 기와 조각과 함께 출토된 고창 용계리 가마의 햇무리 굽 청자완을 들고 있다.
이처럼 청자의 기원에 관한 연구는 더욱 깊어지고 다양해 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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