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진의 문화유적, 그 쓸쓸한 주소
강진의 문화유적, 그 쓸쓸한 주소
  • 특집부
  • 승인 2002.11.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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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자유기고가 김해등
‘남도답사일번지’란 자랑스럽기 그지없고 후대 만 만 년 닳도록 써먹을 연호를 얻은 강진은 참 축복받은 땅이다. 그래서인지 우리들은 부단히도 이 연호를 즐겨 써 먹고 외쳐댄다. 발간하는 책자나 치러지는 행사 인사말에 지겹도록 이 말을 쓰는가 하면, 강진의 들문 초입에다 산만큼이나 커다란 간판을 세워 놓았다. 그것뿐인가 읍내의 상가를 둘러보면 ‘영랑’과 ‘다산’이란 머리글을 달고 있는 간판들이 즐비하다.

이런 광경을 본 외지인들은 강진 사람들의 문화유산에 대한 자긍심과 애착에 칭송과 박수를 아낌없이 쳐준다. 그러나 대단히 송구스럽게도 그 이면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실망스럽고 부끄럽기 짝이 없다. 이 글을 쓰고 있는 필자조차도 문화유산에 대한 올곧은 마인드가 부족했던 터라, 선인과 후손에 대한 직무유기를 저지르고 있다는 죄책감이 앞선다. 앞으로 틈 나는 데로 몇 가지 후안무치에 해당하는 점들을 기고함과 동시에 필자를 비롯한 모든 사람들이 하루빨리 개과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영랑생가의 허허실실(虛虛實實)

영랑생가에 대해 허를 찌르고자 달려들면 어떤 사람은 이렇게 대답한다. “아! 전국에서 어떤 문인의 생가가 이토록 완벽하게 복원되어 있습니까?” 물론 지당한 말씀이다. 영랑생가를 찾는 관광객이 일 년에 줄잡아 삼만 명을 훨씬 넘고 있으니 당연한 반문이겠다. 그렇지만 오가는 사람들을 붙잡고 답사소감을 묻는다면 모두다 한통속인 것처럼 입을 모은다.

시문학파의 선구자요 순수 서정시의 대들보인 영랑의 생가에서 그의 시혼에 젖어보자고 찾아왔는데, 보이는 것이라곤 달랑 초가 몇 채와 꼭 일본식 정원 같이 잘 꾸며진 정원이 전부라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힐난에 가까운 말에 대한 임기응변은 있다. 유족의 대부분이 외국에 있고 전쟁 통에 서울로 이사를 한 지라 유물이 거의 전무하다는 대답 말이다. 그러나 지금껏 우리가 영랑의 유물 수집,보존에 어떠한 관심을 보였는가 되돌아보면 그 말이 얼마나 옹색한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 것이다.

그의 행적을 뒤쫓아 보면 여러 방면에서 그의 흔적과 유품을 찾을 수 있음은 물론 강진에 현존하는 친인척이나 동시대의 사람들에게도 어느 정도 보관되고 있으리라 확신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유품을 비취하려는 일련의 노력을 하지 않았다는 것은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다. 다시 말하여 우리 모두는 생가만이라도 복원한 게 다행이지 않느냐는 지극히 관료적인 사고를 버려야 한다는 생각이다. 영랑생가는 도시락 싸들고 와서 소풍을 즐기고 가는 공원이 아니다.

영랑생가를 찾는 사람이라면 그의 시혼과 시심을 한껏 담아가려고 애쓴다. 이런 답사객들의 목적을 충족해 주는 것은 잘 꾸며진 정원도 아니요 차량을 편히 주차할 수 있는 주차장도 아닌 것이다.

바로 영랑의 마음과 손떼가 묻은 유품인 것이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조그만 예산이라도 세워 발품을 팔아 강진 곳곳을 뒤지고 전국을 훑어서라도 영랑의 유품을 구입하여야 하겠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는 문화재를 보존관리하는 관료들의 책임으로 전가할 수도 없는 일이다.

개인이 소장하고 있는 영랑의 유품을 가장 소소하고 따뜻한 마음으로 기증할 수 있는 용기가 수반되어야 가능할 수도 있겠다. 지금 이 시간에도 어느 누가 알게 모르게 보관하고 있을 영랑의 쓰라린 흔적과 기억들이 지천에서 울고 있는데 말이다.

현구생가 복원의 급선무

어쩌면 내 생각이 섣부른지도 모른다. 도로에 영랑 운운하는 간판들은 즐비한데도 영랑이 누구인지도 영랑이 절창하는 시 한 구절 외우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은데, 현구생가 복원이란 말을 하고 있으니 말이다. 나는 아직도 강진 모 인사의 말을 가슴 아프게 기억하고 있다.

사석에서 현구생가 복원이라는 말을 입에 침이 튈 정도로 역설한 바가 있었다. 그러나 그 분의 한 마디는 나를 저 땅 속 수만리 깊은 곳으로 내동댕이치게 만들었다. 이 시대가 일인자만을 기리지 누가 이인 자를 기억이라도 하겠느냐는 말씀이었다. 강진의 문화인에 가까웁다는 사람들의 생각이 저런데 현구생가 복원은 아직 갈 길이 아득히 멀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 시인 김현구는 철저하게 영랑의 그늘에 가려져 있었다. 영랑이 사교적이고 부유했다면 현구는 내성적이고 가난했던 이유가 가장 크다. 그렇지만 영랑과 함께 시문학 동인에 참여했으며 누구보다도 순수 서정의 시세계를 절절하게 펼쳐갔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한 가지 간과해서는 안 되는 사실이 있다. 강진에 있는 사람은 현구라는 시인에 대해 굳이 알려고 하지 않는데 외부의 답사객들은 일 년에 수천 명이 넘게 현구의 생가를 찾고 그의 발자취를 더듬는다는 사실이다. 그 사람들은 하나같이 혀를 내두르며 현구에 대한 강진사람들의 무관심을 질타한다는 것이다.

이런 실정을 잘 아는 사람이라면 푯말이라도 하나 세워놓았으면 좋으련만 그런 애정과 관심을 보이지 못하고 있는 필자 자신도 부끄럽게 생각하는 일이다. 하루빨리 잠들어 있는 현구의 시심을 흔들어 깨울 일이다.

다산초당의 굴절된 가면

먼저 누구나 다 아는 뻔한 사실부터 말해야겠다. 왜냐하면 이렇게 빤히 보이는 문제점이 아직도 물러설 줄 모른다는 점이다. 얼마 전에 모 중앙일간지 일면에 ‘다산초당도’가 최초로 공개되어 역사학자들과 강진의 인사들이 흥분에 들뜬 적이 있었다. 아뿔싸! 그러나 그걸로 끝이었다. 그로인해 꼭 똥 싸고 밑을 닦지 않은 찜찜함 같은 것이 늘 남아 있었다.

다산 유배지의 그림을 코앞에 들이미는데도 왜 우리 강진사람들은 가만히 엎드려 있는 건가? 잘못 복원되고 사라진 부분이 있다면 고치고 다시 복원해야 옳은 일이 아닌가? 약간의 의구심이 일기는 하지만 철저한 고증을 거쳐 없는 연못은 만들고 와당은
초당으로 바꾸고 사라진 나무들은 얼마든지 심어도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다산초당을 찾는 사람들 모두가 다산이 유배자였던가 은자였던가 하는 의구심을 떨치지 못할 것이다. 앞의 영랑생가의 문제를 지적했듯이 다산유물관도 다산의 유물이 전무하고 복제품 일색이다 는 지적은 피할 수 없을 것 같다. 하루 속히 순차적인 예산을 세워 다산 유물을 구입하여 보존하려는 의지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런 의지 없이는 다산초당은 헛껍데기 문화유적에 불과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어서 빨리 알아차렸으면 하는 바람이다.

불땀이 점점 식어가는 청자사업소

고려청자의 재현과 그에 따른 사업만은 철저하게 지자체의 경영 논리에 두지 말자는 말부터 하고 싶다.
왜냐하면 강진의 청자사업소는 어느 누가 봐도 적자일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어서 하는 말이다. 그러나 세계적인 문화유산인 고려청자 재현에 대한 투자만큼은 우리 지자체의 큰 몫이자 사명이다 는 올곧은 역사 인식을 갖자는 말을 하고 싶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고려청자의 완벽한 재현에 사활이 걸렸다고 본다.

왜 강진의 청자가 중앙에서 헐값이나 쎄일 판매대에 올라야 하는가. 그것은 타 지방의 재현 청자보다도 질이 떨어진다는 결과 밖에 되지 않는다. 그 해결책은 어떻게 보면 간단하다.

사업소에서 운영하는 관요는 청자를 굽는 공장이다 는 개념을 버려야 한다. 대량 생산의 직공이 아니라 그들 모두가 청자재현에 열정을 가지고 몰두해야 옳으며 개개인 모두가 고려청자를 만드는 장인 의식과 소명을 갖도록 처우개선과 체제 개편을 했으면 한다.

그럼으로 인해 고려청자의 재현 순도가 높아지면 높은 가격을 받는 것은 물론이고 또한 만년적자를 해소할 일이 아닐까 생각한다. 밑바탕에는 역사의 잉걸불씨가 지글지글 끓고 화목은 지천으로 깔렸는데 그 불을 지필 불지기가 없어서야 되겠는가.

우리가 무심코 짓밟고 있는 문화유산들

고려청자의 역사성이 너무 강한 탓에 잊혀져가고 사라지는 것들이 있다. 옹점이라고 불렸을 정도로 융성했던 칠량의 옹기마을이 그 첫 번째이다. 지금이야 겨우 한 집 만이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안타까운 현실이지만 하루빨리 제도적인 장치를 마련하여 옹기사업을 계승 발전하고 그에 따른 옹기박물관도 건립할 필요성을 느낀다.

그리고 옹기에 못지않게 강진 곳곳에 산재해 있는 분청사기 도요지와 조선백자 도요지도 그 옛날 청자도요지처럼 그렇게 내버려 둘 수는 없는 문제이리라. 그리고 유형문화유적에 쏟은 관심을 무형문화재에도 눈길을 돌려야 하겠다. 작천출신 가야금 산조의 명창인 함동정월과 칠량출신의 인간문화재 김성권도 그렇고 또 민주화 투사인 윤한봉과 김현장 같은 사람들의 기록들과 사진들도 체계적인 관리 보존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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