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진에 천문대가 있었다. -고려도공들이 별을 관측했을까-
강진에 천문대가 있었다. -고려도공들이 별을 관측했을까-
  • 강진신문
  • 승인 2002.08.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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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사고전 연구소 양 광 식〉
알려진 바로는 우리나라 최초이며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대가 신라 선덕여왕(632-647)때 세운 국보 31호인 첨성대(瞻星臺)라 한다.
그런데 하늘의 별자리를 관측하던 천문대 이었는지는 단언하기 어렵지만 우리 강진의 무위사와 정수사에도 각각 첨성각(瞻星閣)이 있었기에 모든이에게 알려져 체계적인 연구가 필요할 것으로 본다.
사람이 직립보행을 하고부터 짐승을 길들여 타게 되었고 다음으로 많은 물건을 실어 나르기 위해 수레를 발명하고 길을 넓히는등 필요에 부응하려고 부단한 노력을 해오고 있다. 그러나 지금도 지구상에는 사람의 발길이 전혀 닿지 아니한 곳이 남아있는데 날개를 매달고 공중을 날아 다니거나 우주를 누빌 재주도 없었는데 무슨 이유로 한군데 가만히 앉아서 별자리를 관측했고 또 무엇에 사용하기 위해서 연구 하였을까를 자료에 의하여 추론해보기로 하자.
하늘에 관한 연구자를 음양가(陰陽家)라 할때는 천문(天文), 역수(曆數), 풍수(風水), 지리(地理)등에 의하여 일월(日月)의 행사를 정하거나 길흉, 화복을 정하는 사람이라 하며, 천문(天文)이라할때는 일월성신(日月星辰)의 운행(運行), 비, 바람, 눈, 벼락(雨風 雪 露)등 하늘에 일어나는 갖가지 현상이라 하고, 천문학(天文學)이라 할때는 천체의 현상, 운행, 다른 천체와의 거리 및 관계등에 대하여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학문이라고 한다. 또 천문을 보고 길흉을 점치는 사람은 성학(星學)이라 하고, 운명 길흉등에 관한 학문으로는 명과학(命課學)이라고도 한다.
우리나라는 고려초에 천문을 연구하는 기구인 태복감(太卜監)을 두게 되어 1023년에 산천대(司天臺), 1116년에 사천감(司天監), 1308년 서운관(書雲觀), 1433년 관상감(觀象監), 1948년 중웅관상대, 1974년 국립천문대, 1982년 중앙기상대로 바뀌어 현재에 이르고 신라때에는 천문박사라하고 조선조에는 천문교수, 겸교수, 훈도등의 직급을 두었다한다.
강진군내 사찰 가운데 첨성각(瞻星閣)이 있었던 곳은 성전면에 있는 무위사와 대구면에 있는 정수사인데, 영암출신이며 풍수지리의 개조인 도선국사(道詵國師)와도 깊은 연관이 있다.
무위사는 875년에 두 번째 중창을 하였고, 정수사는 최초로 창건하였으며, 이보다 먼저는 월남사 (月南寺)에사 스님 노릇을 시작한 것으로 기록이 되었다.
무위사는 1739년 9월5일에 작성된 「무위사지」에 의하면 신라 진평왕 39년 정축(617)에 원효국사(元哮國師617-686)가 최초로 창건하여 관음사(觀音寺)라 하고 전각(殿閣)이 3, 당(堂)이 3, 실(室)이 4, 각(閣)이 2, 문(門)이 3이었다 한다. 이중에서 각(閣)이란 첨성각(瞻星閣)과 종각(鐘閣)을 말한다.
정수사는 1723년에 엮은 정수사지의 전각(殿閣) 도면에 나한전(羅漢殿)의 동쪽, 향적전(香寂殿)의 동북쪽에 첨성각(瞻星閣 799) 을유(805)에 도선국사(道詵國師827-898)가 두 곳에 절을 창건하였다.
별(星)의 변화를 관측하는 곳이 몸이 아픈 사람들의 병을 낫게 해주는 기능을 맡은 무위사와 불경의 오묘한 뜻을 찾으려 연구하던 정수사에 무엇 때문에 있었다는 기록은 없다.
그러나 유추해 보면 무위사는 왕실의 건강과 융성을 비는 소임을 맡았고, 정수사는 제사의식등에 사용되는 의기를 제작하던 도공들의 기도처 소임을 맡았다고 볼 수가 있다.
사람의 사회에서 서로가 오고가야 무슨일이 이루어지듯이 가장 짧은 거리, 적은시간, 그리고 천재지변에 대한 예측등을 위한 실용관측기능을 맡은곳이 첨성각(瞻星閣)이 아니었을까 추론해본다.
별자리 연구에 관심 있는 연구자가 나서서 필자의 예시가 맞는가를 과학적으로 입증해 보고, 고려때의 번창하던 기운을 다시금 살려내어 지역발전에 큰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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