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멜과 강진(하)
하멜과 강진(하)
  • 주희춘
  • 승인 2002.07.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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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멜과 강진(하)

지난 20일 하인드브리스 주한 네덜란드대사는 강진을 예고없이 방문했었다. 하인드브리스 대사는 월드컵이후 네덜란드에서 한국에 대한 관심이 폭발적이라고 소개했다.
핸드릭 하멜이 역사속의 인물이었다면 히딩크는 살아있는 신화로 네덜란드와 한국을 잇고 있는 셈이다. 하멜은 어디까지 살아 날 것인가.
하멜은 사실 네덜란드 정부요원이 아닌 일반 상선의 선원에 불과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네덜란드에서 그에 대한 관심은 상대적으로 적다고 한다. 네덜란드 정부의 공적인 업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한국에 표류했다면 그에 대한 대우는 당연히 달라졌겠지만 평범한 인물에 불과했기 때문에 네덜란드 정부차원의 기념사업은 거의 없었다는 것이다.
지금도 그런 시각에는 큰 차이는 없다고 한다. 네덜란드에 하멜의 존재가 뜨겁게 부각되고 이에따른 양국간의 공식적인 교류등은 지금으로서는 기대하기 힘든 상황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하멜의 발자취를 조명하려는 작업은 꾸준히 진행되어 왔고 이번 월드컵이 달리는 말에 채찍질을 가했다.
하멜일행이 조선에 억류되어 있던 13년의 세월중 절반이 넘는 7년동안 생활했던 강진은 그동안 그의 고향 네덜란드 호르쿰시와 자매결연등을 맺으며 하멜살리기 작업을 꾸준히 벌여왔다.
지난 97년 5월에는 호르큼시 시장일행이 강진군을 방문해 자매결연 의향서를 체결했고, 다음해 10월에는 강진군수를 비롯한 방문단이 호르큼시를 방문해 두단체가 자매결연을 맺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동안 호르큼시는 강진에 하멜동상과 나막신을 기증했고 강진군은 청자를 기증하기도 했다.
강진군은 앞으로 하멜일행이 살았던 병영면 성동리 70번지 일대에 총 42억원을 투입해 네덜란드촌을 조성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다. 여기에는 하멜전시관이 들어서고 전시실과 네덜란드풍차 및 화훼시설, 네덜란드 마을등이 들어선다.
하멜전시관에는 하멜표류기 체험실과 기념물 판매소, 하멜표류기와 하멜일행의 삶에 대한 설명문과 자료, 하멜동상, 하멜이 사용했던 대표등이 전시되어 명실공히 하멜을 위한 전시관이 될 전망이다.
하멜의 고향 호르큼시에는 핸드릭 하멜을 기념하는 여러가지 이정표들이 많다. 시내에는 하멜의 거리가 있고 하멜의 동상도 세워져 있다고 한다. 또 호드슨과 헤이그등에는 하멜공원이조성되어 있어 ‘최초의 서양인 조선전문가‘를 기리고 있다. 호르큼시는 지난 7월 3일 강진에 “한일월드컵 축구의 좋은 결과로 2003년 호르큼시에서 개최되는 하멜 한국표류 350주년 기념행사에 좋은 홍보가 되었다”는 축하전문을 보내왔다. 강진군은 히딩크감독이 한국에 귀하할 경우 본적을 강진 병영으로 할것으로 추진하고, 이번 청자문화제에도 초청할 예정이었으나 히딩크는 국 네덜란드로 새로운 출발을 위해 떠났다.
내년은 하멜이 조선에 표류한지 꼭 350주년이 되는 해이다. 호르큼시가 350주년 기념행사를 어떻게 치룰 인지 구체적으로 알려지지 않았으나 월드컵 기간동안 한국과 네덜란드 양국에서 분출됐던 애정표시는 내년 기념행사에 상당한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우선 네덜란드 영화기획사가 하멜표류(1653년) 35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남, 하멜 재방문하다(Nam, Hamel Revisited)'라는 영화를 제작중이라는게 눈길을 끈다.
이 영화는 네덜란드 입양아 애네믹 남씨가 20여년만에 모국을 방문, 하멜이 거쳐간 행로(제주-해남-강진-나주-장성-공주-천안-수원-과천-서울)를 따라가며 한국의 문화와 역사를 직접 체험하고, 소개하는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제작될 예정이라고 한다. 내년 행사때는 강진군의 관계자들도 호르큼시를 방문할 것으로 보인다.
무엇보다 이같은 정황들은 군이 추진하고 있는 하멜기념사업에 가속력을 불어넣어줄 전망이다. 군은 하멜전시관 건립등이 2005년 이후 세우는 것으로 잡혀있기 때문에 하멜 한국표류 350주년을 맞아 내년부터 착공되기를 바라고 있다.
핸드릭 하멜은 오늘날 관광자원으로 꽃피울때 그 의미가 있을 수밖에 없다. 막대한 예산을 투입해 단순히 서양사람들이 옛날에 생활했던 곳을 가꾸어 기념하는데 그친다면 주민들의 호응을 받기 어려워진다.
이와관련 하인드브리스 대사는 의미있는 말을 남기고 갔다. 지금의 병영사람들이 350여년전 하멜일행이 살았던 시대에서 살 각오를 해야한다는 것이었다. 당시 시대적 상황을 철저히 복원하고 지켜나가는 것이 ‘하멜플랜’의 성공여부가 달려있다는 말이었다.







소박스

헨드릭 하멜은 1630년 네덜란드 호르큼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세 번 결혼했었다. 1653년 1월 10일 ‘스파베르(Sparwer·바다 보라매)’란 상선이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 부근에서 출항해 아프리카 남단을 돌아 인도네시아 대만을 지나 종착지인 일본의 나가사키에 이르는 기나긴 동양 항해 길에 올랐다. 이 배에는 헨드리크 하멜을 포함해 64명의 선원들과 상인들이 타고 있었다.
이들은 배가 대만과 나가사키 중간에서 모진 태풍을 만날 때까지는 곧 이루어질 무역으로 큰 돈을 벌 수 있으리라는 희망으로 행복감에 겨워 있었다. 그러나 이 배는 곧 태풍을 만나 파선되었고 파도에 떠밀려 제주도 남쪽의 ‘가파도’에 도착했다. 1653년 8월 15일의 일이다.
그이후 하멜과 그의 일행들은 서울과 강진의 병영등에서 13년의 억류생활을 하다 1666년 9월 5일 탈출, 14일 일본 나가사끼에 도착했다.
하멜은 한국을 탈출한 후 바로 고향으로 가지는 않았다. 1667년 고국으로 돌아가도 좋다는 일본쪽의 허가를 받아 다른 일행은 배를 이용해서 1668년 7월 20일 조국에 도착했으나 하멜은 인도에 남아 있었다.
그 이유는 그가 아직 결혼을 하지 않아서 네덜란드에 대한 항수가 덜했기 때문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하멜은 표류기를 완성한 후 1670년에야 조국으로 건너갔다.
귀국한 하멜의 생활은 한국에서 머물기 전 만큼이나 알려지지 않았다. 1734년께 호르컴에 보관되어 있던 문서에 따르면 하멜이 1670년 호르컴에 정착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하멜은 그후 1692년 2월 12일 6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는 여전히 미혼이였다.
하멜은 탈출후 왜 고향으로 바로 돌아가지 않았을까. 또 왜 죽을때까지 미혼을 고집했을까. 혹자들은 하멜의 이같은 행적은 병영에 가족을 두고 탈출, 이들을 잊지 못해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는 말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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