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우진과 배우는 갑골문자 이야기<35>
김우진과 배우는 갑골문자 이야기<35>
  • 강진신문
  • 승인 2019.04.08 0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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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우진 _ 한자·한문 지도사

                                       奮 떨칠 분

흥분(興奮), 분발(奮發), 고군분투(孤軍奮鬪)등에 쓰는 '떨칠 분(奮)'자의 주인공은 새(     새 추)이다. 한 마리의 새가 두 날개를 활짝 펼치고 들판을 박차고 하늘로 날아오르는 순간을 그렸다. 좌우로 길게 그린 날개는 역동적인 이미지와 함께 야생으로 돌아가려는 억누를 수 없는 욕망을 시각적으로 보여준다. 孤軍奮鬪(고군분투)는 '홀로 일어나 여럿을 상대로 싸운다'는 뜻이다.
 
나는 이 사자성어를 볼 때마다 불세출의 승부사 조훈현 바둑기사가 떠오른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일본바둑은 세계최강이란 공식이 통했다. 한국은 중국이나 대만에게조차 바둑약소국으로 푸대접을 받았다. 이런 와중에 1987년 세계바둑올림픽이 열렸다. 배당 받은 16강 본선 티켓은 일본 5장, 중국 4장, 대만 3장인데 반해 한국은 달랑 한 장이었다. 조훈현은 단기필마로 전장에 나가 세계최강의 절정고수들을 차례대로 꺽었다. 마침내 우승컵을 들어 올리고 세계의 바둑황제로 등극했다. 


                                       奪 빼앗을 탈
'빼앗을 탈(奪)'자는 새가 날고 싶은 욕망을 박탈(剝奪)당하고 있는 모습을 그렸다. 손으로 새의 발목을 붙들고 있다. 새의 입장에서 보면 기회를 빼앗기고 권리를 빼앗기는 격이다. 인간사회로 돌려 본다면, 특혜와 같다는 생각이 든다. 특혜는 한 사회의 기초적인 척도라 할 수 있는 공정성을 무너뜨린다. 타인의 정당한 진출(進出)을 박탈(剝奪)하기 때문이다. 최근에 '칙센트미하이'의 <창조성의 즐거움>을 읽고 환골탈태(換骨奪胎)가 창의에 이르는 길임을 더욱 알게 되었다.

환골(換骨)은 학습(學習)이며 온고(溫故)다. 지금까지 축적된 선인들의 시(詩)를 배우고 익히는 것이다. 탈태(奪胎)란 승화(昇華)이며 지신(知新)이다. 자기 것으로 만들어 새로운 경지로 나아가는 것이다. '칙센트미하이'는 그의 책에서 말한다. 역사 속에 축적된 과거의 유산(遺産)을 배우는데 치열하지 않으면 세상을 바꾸는 창의로 나아갈 수 없다고. 잠시 독창적일 수 있고 잠시 똑똑할 수 있지만 절대 오래가지 못한다고.
 

                                       和 화할 화
'화할 화(和)'자는 형성자이다. 구성요소는 기계적으로 나누면 '벼 화(禾)'가 발음표기용이라면 '입 구(口)'는 뜻 표시용 글자이다. 하지만 이 두 글자는 그 역할과 무관하게 '수확한 곡식(禾)을 함께 나누어 먹으니(口) 화목하다'는 해석을 낳았다. 과연 그럴까. 현재의 글꼴 '화(和)'와 갑골문에서 무엇이 살아남았고, 무엇이 사라졌으며, 무엇이 새로 들어왔는가를 살펴보자. 3000년 이상을 살아남은 글자는 '화(禾)'이다. 반면에 사라져버린 것은 막대기들을 묶어 놓은 듯한 그림이다.
 
대부분의 학자는 이것을 관악기로 본다. 대나무로 만든 지금의 팬플루트와 같은 악기라는 것이다. 수천 년 전에 그런 악기가 있었을까 의심이 들겠지만, 기원전 3,500년경 메소포타미아지역에서 14관의 팬플루트를 연주하는 모습이 양각된 돌이 출토되었다. 관악기를 지우는 대신 처음에는 없던 '입 구(口)'가 넣었다. 관악기는 입으로 부는 바람에 따라 다양한 소리를 낸다. 그 둘의 기본적인 관계는 조화일 수밖에 없다. 

                                       穆 화목할 목
'목(穆)'자는 풍요로움이 화목(和睦)으로 가는 길임을 보여준다. 현재의 글꼴도 갑골문이 뜻하는 바를 충분히 읽어낼 수 있을 만큼 하나하나의 그림들을 그대로 옮겼다. 먼저 알알이 잘 익어 고개 숙인 벼 이삭(禾)이 눈에 띈다. 너무 잘 익어서인지 알곡(白)이 땅으로 떨어진다. 3개(?)는 많은 것을 의미한다. 태풍도 없고 가뭄이나 병충해가 없어야 가능한 일이다. 오랜만에 맞이한 대풍년이다. 너나없이 가족을 배불리 먹일 만큼 농사가 잘 되었으니 모두가 기쁘고 화목할 수밖에 없다.
 
한자를 배울 때, 그림문자(갑골문, 금문 등)와 함께 배우면 좌뇌와 우뇌를 고루 쓰게 되어 창의성 발현에도 도움이 된다는 주장이 있다. 좌뇌가 언어적, 논리적인 기능에서 우월하다면 우뇌는 감정과 이미지, 공간적 기능에서 우월하다는 것이 현재까지 뇌를 보는 정설이다. 그런데 창의적인 사람일수록 한쪽에 치우침 없이 좌뇌와 우뇌를 고루 사용하는 양뇌형 인간이라고 하니 시도해볼만한 공부 방법 같다.  


                                       再 다시 재
재(再)자는 '두 번', '거듭', '다시 한 번'의 뜻을 품은 글자다. 나무토막을 하나씩 더 쌓아올리는 데서 그러한 뜻이 나왔을 것이라고 해석되어왔다. 하지만 갑골문의 발견으로 나무토막과 전혀 관계가 없음이 밝혀졌다. 갑골문은 한 마리의 물고기를 그렸다. 물고기의 전체윤곽과 지느러미도 보인다.

그런데 눈으로 따라가 보면 물고기의 윤곽과 동떨어진 선 하나와 만난다. 입 위에 가로로 그려진 선이다. 도시어부에서 계측판 위에 올려진 물고기를 연상케 하는 이 생뚱맞은 선 하나가 재(再)자의 뜻을 결정하는데 핵심자 역할을 했다면 믿을 수 있겠는가? 서로 다른 두 개의 해석 속으로 들어가 보자. 먼저 수면을 표시했다고 보는 견해이다.
 
물고기는 산소가 부족해지면 수면위로 입을 내밀어 숨쉬기를 거듭한다. 바로 이 모습이란다. 다른 하나는 한 마리의 물고기가 더 있음을 암시하는 표식이라는 것이다. 물고기를 두 번 그리려면 시간도 오래 걸리고 복잡하니 선 하나로 대신했다는 것이다.   


                                       稱 일컬을 칭 
'일컬을 칭(稱)'자는 '벼 화(禾)', '손톱 조(爪)', '다시 재(再)로 구성되어있다. 하지만 갑골문을 보면 최초의 稱(칭)자 속에는 禾(화)가 없다. '벼'를 뜻하는 화(禾)는 나중에 들어왔다. 문자는 인간의 생각과 감정을 담는 그릇이면서 문화를 담는 그릇이기도 하다. 화(禾)가 들어왔다는 것은 농경(農耕)사회로의 진입을 말해준다.
 
갑골문으로 눈길을 돌려보자. 어떤 이야기가 담겨있는지를 보려면 먼저 무엇을 이미지화 했는지를 알아야 한다. 상하로 두 개의 그림이 보인다. 위는 손이고 아래는 물고기다. 손으로 물고기를 들고 있다. 어로(漁撈)가 주류였던 사회를 반영한다. 혹자는 물고기의 무게를 재는 모습이라고 말한다. 그래야 칭(稱)자가 '일컫다' 외에 '저울', '저울질하다', '헤아리다'의 뜻을 더 가지고 있는지에 대한 설명이 가능하다. 현재를 기준으로 과거를 추론했다. 추상적 사고를 하기 시작하는 청소년기가 한자를 배우기에 가장 결정적 시기라고 생각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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