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강진은 한때 문림옥향이라 일컬어 왔다. 1930년대 시문학파 김영랑과 김현구가 있어 우리고장은 서정시의 거장을 두 분이나 배출한 문학의 고장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영랑은 일찍이 세계적으로 추앙받는 시인이 되었다. 그러나 현구는 영랑과 같은 지역, 같은 시대, 같은 연대, 같은 시문학파 동인인데도 왜 알려지지 않았고 어둠에 갇혀 있었을까? 현구 선생은 1950년 10월 3일 6·25 참화로 서성리 낙화정에서 공산당이 휘두르는 대창에 의해 무참히 죽임을 당한 시대의 희생양이 되었다. 때문에 선생은 85편의 주옥같은 시를 남겼음에도 빛을 보지 못하고 문학사에 묻혀버린 것이다.
 
그러나 우리 지역의 뜻있는 분들이 묻힌 보화를 찾기 위해 쉼 없이 노력하여 왔다. 1970년 시인의 유고집 발간과 1992년 도서관 정원에 시비를 건립, 그 후 현구 시인에 대한 학술강연 등 선생을 조명하기 위한 활동을 계속해 왔다.
 
무엇보다도 획기적인 계기가 된 것은 2012년 시문학파기념관이 개관 되면서부터라고 할 수 있다. 1930년대 시문학파 김영랑, 박용철, 정지용 등과 함께 현구에 대한 조명운동이 본격적인 전기를 맞게 되었다.
 
그동안 서울대를 비롯한 연세대, 고려대, 중앙대, 전남대, 조선대, 목포대 등 각 대학 국문학과 교수들의 연구논문이 꾸준히 발표되었고 드디어 지난해에 이어 올해 제2회 현구문학제가 개최되었다. 특히 현구생가 복원식을 겸한 제2회 문학제는 전국 200여 문학제 중에서 한 번도 시도하지 않은 주민 큐레이터가 운영하는 '시와 음악이 흐르는 목요살롱'을 기획, 시 낭송과 시극, 음악이 어우러진 작은 무대를 연출하여 군민들로부터 큰 호응을 받았다.
 
더욱이 현구의 대표 시 '임이여 강물이 몹시도 퍼렇습니다' 등 5편의 시를 작곡하여 선보인 것은 물론 현구의 시를 전통 시조창으로 재해석함으로써 대중화를 꾀하는데도 한몫을 하였다.
 
그러나 아쉬운 점이 있다면 현구가 영랑과 함께 시문학파의 거장 임에도 정작 우리 군민은 현구 선생을 아는 사람이 많지 않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현구 선생을 영랑과 더불어 강진의 문학자원으로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일까?
 
흔히 70년대 우리 군을 일컬어 문림 옥향이라고 하였던 것은 문학인들의 활동이 활발한 고장이었음을 대변하는 대명사였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공직자를 포함한 온 군민이 현구를 알고 알리는 홍보대사가 되는 것이며 각급 기관의 크고 작은 행사시 기관장 인사나 축사내용에 영랑과 현구를 나란히 거론하여 우리 고장이 문학의 고장임을 군민들에게 인식 시키는 노력과 영랑과 현구 생가를 중심으로 하는 문학 특구를 지정하여 관광자원화로 지역 경제에 기여 할 수 있게 하고 초·중·고 학생들에게 현구 시를 읽히고 교과에 포함시킴으로써 문학인재를 양성하는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한 모든 노력은 자치단체가 책임을 지고 추진함으로써 문학의 고장의 전통을 잇는데 노둣돌을 놓아야 할 것이다. 이 길은 군민의 정서에도 맞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