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시 : 8월 31일(금) 13:30
●장소 : 서울시 고궁박물관
●주제 : 다신계 결성 200주년 기념 다신계와 강진의 차



실학자 정약용의 다공(茶供)과 다신계(茶信契)
정영선 _  한국차문화연구소 소장

다산은 우리나라 영남과 호남에 흔한 차나무로 만든 조선의 차(茶, 眞茗)인 동차(東茶)가 중국차 못지않게 훌륭하다는 인식을 당대와 후대의 학사·승려들과 농민들에게 알리어 문화적 자긍심을 지니게 하였다. 당시 일각에서는 서울 사대부들이 토산차를 무시하고 얕보았고 선조(宣祖, 재위 1568~1608)도 중국의 육안차(六安茶)와 조선의 작설차가 다르다고 인식할 정도였으며, 농민들은 작설나무를 땔나무로도 쓸 정도로 무시당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가 유배 말기에 써서 해배 후에 완성한 「경세유표」를 보면, "생각건대, 남방의 여러 현에서 생산되는 차는 지극히 좋다(案南方諸縣産茶極美)"고 했다. 이덕리(李德履)가 1785년 저술한 「記茶」에도 동차가 우수하다고 했지만 일반화되지 못하였는데, 암행어사와 부승지를 지내었고 국가에 유익한 발명품도 만든 면죄된 대학자 정약용의 동차 인식은 조선 말기와 함께 특히 일제강점기에 음다풍속이 이어지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반세기 후의 다가인 박영보(1808~1872)도 정약용을 다가로서 존경하였고 우리나라 차는 차맛이 더없이 좋다고 썼다.
 
다산은 차 만드는 '茶役'은 사대부나 학사가 해야 한다는 인식을 심어 양반사회 개혁의 시발점을 만들었다. 탁옹이 '茶山'인 강진 초당에서 10년 반 동안 살면서 다역을 반복하여 경험하지 않았다면 다서와 앞글의 제다에 관한 많은 기록을 쓸 수가 없다.
 
「다신계」에서 '茶役'은 계의 비용을 조금도 들이지 않고 계원이 행할 것을 약조로 정해두고 제다비용은 한 푼도 없었다. 다산보다 한 살 적은 윤형규(尹馨圭, 1763~1840)가 1833년에 쓴 「茶說」에는 대용차도 '茶'라 하여 즐겨 마시게 된 이유를, "싹과 잎을 따서 증포(蒸曝)하여 약을 만드는 것 역시 쉬운 일이 아니니 매번 걱정이 된다"고 하였으니, 당시의 사대부들이 제다를 번거롭고 어려운 일로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金命喜(1788~1857)도 채다와 뜨거운 쟁에 찻잎을 덖는 방법을 자세히 썼다. 따라서 다공(茶供) 전반을 학사의 공부거리로 인식하게 되고 19세기의 지식인들도 '茶'와 '文化'에 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현대에는 가족 전체의 여가생활이 매우 중요해졌고 가정경제의 한 부분을 차지하게 되었으니, 기왕이면 수신제가와 참멋이 나타나는 산골제다와 가정다도가 유익하다. 
 
가장 필요한 '다산초당'과 다옥(茶屋)의 복원이 시급하다. 신라의 다연원(茶淵院)과 이규보의 앵계초당 그리고 김시습의 다옥은 훗날로 미루더라도 차와 함께 살던 정약용의 다옥 유적은 복원되어야 한다. 소쇄미를 지녔던 다산초당은 현재 덩그런 기와집으로 변해 있다. 초의가 그렸다는 「茶山圖」와 「조선의 차와 선」에 그려져 있는 유배 살던 초려가 없으니, 우리의 천년 차문화사가 부끄럽게도 세계에 자랑할 확실한 다옥이 없는 셈이다. 문화재 복원에 기와만이 능사가 아니다. 유물관은 기와집도 무관하겠지만, 이제는 관광객도 다산이 유배를 당한 정치적·사회적 이유를 생각하여 우리와 조상의 마음을 돌아보며 반성해야하고, 긍정적이며 따뜻한 눈으로 초가집을 바라보는 것이 후세를 위한 일이다. 「다신계」는 한국문화의 특징을 지닌 다속(茶俗)이므로 다회나 동아리로서 현대에도 이어지고 있으나, 내면의 벽을 확인하고 진정한 소통을 한다면 더욱 아름다운 한국이 될 것이다.

다산의 강진·해남지역 유·불(儒.佛)교유에 미친 영향
박동춘 _ 사)동아시아차문화연구소 소장

다산 정약용은 조선 후기 대표적인 실학자로, 정치, 경제, 지리, 의학, 차 등에 수많은 저술과 편찬을 남겼다. 500여 권이라는 그의 방대한 저술은 다산학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이다. 이를 통해 다산의 학문 방법, 정치, 경제, 사회, 문학, 차, 교유관계 등을 연구하여 후대에 그가 남긴 영향을 연구한 논문들이 다수 발표되었다.
 
다산은 강진 유배 시기, 강학을 통해 학문적 결속과 사제 관계로 다져진 다산학단을 형성했다. 이는 동지적 학문집단이면서 다산의 영향력 아래 사승 관계로 맺어진 학파를 형성했다는 특성을 가진다. 특히 다산학단은 신분이나 가문을 중시했던 조선 후기 시대적 흐름에서도 승속, 중인과 양반을 불문하고 학문이라는 구심점을 세워 그 휘하에서 신의를 익혀 나갔다는 점이다.
 
한편 다산이 1818년 해배 직후 결성한 다신계는 초기 다산학단 제자들 18명이 스승이 돌아가신 후에도 신의를 잊지 말자는 결의에서 만들어진 학계(學契)였다. 이후 다산이 사의재 시절 학연을 맺었던 중인의 자제와 전등계를 아울러 다신계가 완성되었다. 다산초당 시기 제자들은 다신계를 결성하면서 약간의 금전을 사전에 모아 다신계의 경제적인 토대로 삼았으며, 전등계 제자들도 약간의 전답을 마련하여 계의 토대를 마련했다.
 
다산의 다신계는 해배 이후에 이들의 결속을 위한 학계로, 차를 만들고 시를 지어 정학연이나 학유를 통해 다산에게 전달하게 했다. 다산과 제자들 사이를 이어주는 매개자가 다산의 아들이었고 이들 또한 다신계의 일원이었다.
 
다산이 차에 천착한 것은 강진 유배 시기이다. 아암에게 차를 구하는 글을 지을 정도로 차에 대한 애호가 깊어졌는데 강진 유배 초기 다산은 병을 치료하는 약으로 차를 활용하다가 점차 차를 즐기는 여유를 찾았다. 특히 차에 이론에 밝았던 다산은 차 이론가이며 향유자로서 강진에 산재한 차를 활용하여 국익과 민생에 도움이 되는 차의 실용을 주창하였지만, 이러한 주장을 실현하지는 못했다. 다산은 사의재 시절 아암과 그의 제자들에게 차를 공여 받다가 1811년 아암이 열반한 이후 다산초당 시절부터 자급자족을 도모했을 것으로 보인다.
 
다산의 이런 차의 애호는 그의 제자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1818년 겨울 해남에 거주하는 다산계 제자들이 주축이 되어 시회를 열었다. 바로 『가련유사』는 다산의 제자들이 두 차례 문회(文會)을 열어 차를 즐기며 시를 지어 서로의 이상을 공유하려 했으며, 마치 동림고사를 모방한 유불 교유를 이어갔고 이들의 중심에는 다신계와 전등계 제자들이 주축이 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이다. 이뿐 아니라 초의와 그의 제자들, 그리고 다산가는 대를 이어 차와 시를 통한 교유가 있었다. 따라서 다산이 강진, 해남지역의 유불 교유에 미친 영향은 근대까지 이어졌다는 점에서 역사적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우리가 차문화와 차산업을 연구하면서도 깊게 빠지는 함정이 있다. 바로 지금의 시각으로 예전의 문화를 보려고 하는 점이다. 또한 자신이 알고 있거나 행하고 있는 것을 정당화시키려는 아전인수격인 주장들이 난무한다. 보다 객관적인 시각에서 검증하고 고쳐나가야 한다.

<<다신계>>의 전승과 후예 
박희준 _ 한국차문화학회 회장

≪다신계≫는 신분과 종교를 초월한 차를 중심으로한 차생산문화공동체이다. 차생산의 노동에 있어서도 평등성이 주어졌고 계원 상호간의 신뢰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협동조합의 성격도 가지고 있다.
 
≪다신계≫의 차문화를 알아보기 위해,  다산초당과 그 주변에서 찻잎을 채취할 수 있는 환경을 살펴보았다. 귤동, 석름봉 그리고 석문과 덕룡산이, 다산초당이 있는 귤동에서 쉽게 찾을 수 있는 곳이었다.
 
≪다신계≫에서 만든 차는 잎차와 떡차가 있다. 잎차는 다산이 만드는 방법을 간략하게 서술하여 그것이 어떤 차인지 규명하기 쉽지 않지만, 오늘날의 녹차와 백차의 그 중간에 있는 차일 것으로 생각된다. ≪다신계≫의 계원은 아니지만 다산의 강진 마지막제자라는 이시헌은 차의 포장에서 '갑(匣)'이란 개념을 넣었는데, 이것은 금릉월산차와 백운옥판차로 이어지는 잎차의 전통이 되었다.
 
≪다신계≫의 떡차는 다산이 창안한 구증구포 또는 삼증삼쇄의 방법으로 만드는 차인데, 가루를 내어 성형을 하기 때문에 단차 또는 용단차라고도 한다. 이 제다방법은 이시헌에게 전승된 확실한 기록이 있고, 많은 기록들이 초의선사와 만덕산 백련사와 강진 보림사에 전승되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그 가운데서도 초의선사가 중심에 있고 그 제다법은 대흥사의 비구니 그리고 이학치 등으로 전승 되었다. 그러나 이학치와 같은 시기에 대흥사에 있었던 응송 박영희는 전혀 다른 단차제다법을 증언한다.
 
다산에게서 직접 제다법을 전수받은 기록이 나오는 이시헌의 후손들은 이한영에 이르기 까지, 떡차보다 잎차의 생산에 더 많은 힘을 기울였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전승과정에서 '금릉월산차'라고 하는 '백운옥판차'보다 앞선 차가 있음에도 '백운옥판차'를 우리나라 최초의 상표라고 하는 것은 우리 스스로 우리차문화의 역사를 스스로 폄하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이덕리가 지은 ≪동다기≫도 한동안 다산의 저술로 알려졌다. 그렇지만 다산의 저술이 아닌 것이 판단된 지금 다산에 대한 연구가 더욱 활발해졌다. 오히려 다산이 차문화사에서 차지하는 위상이 높아져서 차문화 중흥조라고 까지 칭하게 되었다. 진실의 힘만큼 강한 것이 없다. 그러나 만들어지고 부풀려지는 것은 오히려 역사 속의 인물에 대한 제대로 된 평가가 아니라 욕되고 한다. 본 연구자는 다산을 차산업 중흥조로 보고, 초의선사를 차문화 중흥조로 보는 것이 오히려 우리차문화산업에 좋은 지향점이 된다고 생각한다.
 
≪다신계≫의 전승은 두 가지 관점에서 살펴보았다. 먼저 ≪다신계≫의 약조 가운데 하나인 차가 다산에게 보내어지는 것이 언제까지 실천되었으며 이 약조가 지켜지는 가운데  형성된 ≪다신계≫의 정신문화적 가치성을 살펴보았고, 그리고 ≪다신계≫의 제다법의 전승과정에서 우리 전통 제다문화의 무형적 가치를 알아보았다.
 
≪다신계≫는 다산이 해배되어 두릉으로 가고난 뒤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하여, 다산이 죽기 얼마전 다산 스스로 ≪다신계≫가 아니라 무신계라고 할 정도로 쇠락하였다. 그러나 이 ≪다신계≫의 정신을 이어가는 것은 월출산 백운동의 이시헌이었을 것으로 보이고, 이러한 사실을 범해는 <다가>에서 "믿음이 가벼워지는 것을 막았다."라고 표현하였다. 이 <다가>는 만덕산과 덕룡산에서 생산된 용단차는 오히려 사귐이 활발한 것을 끊었다는 표현을 하여, 사방에서 만덕산에 요구하는 차가 많아지자 그것에 다 대응할 수 없었던 승려들의 곤란한 심정을 표현하고 있어, 강진에서 ≪다신계≫가 지속되는 차문화를 함온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오늘날 ≪다신계≫의 문화적 전승의 후예는 윤재찬과 그 뒤를 이은 양광식, 그리고 강진지역의 차인들이 실천하고 있다. 그러나 ≪다신계≫의 차문화 전통을 1930년 때까지 지켜온 사람도 1950년대 되살림하여 1970년대 우리에게 드러내고, 오늘날까지 다산의 차향기와 차정신을 전하여준 것은 강진의 귤동에 살았던 낙천 윤재찬이었다. ≪다신계≫의 정신을 전하는 마지막 제자라고 할 수 있다. 최근에 공개되는 ≪귤림문원≫에 나오는 기록들은, 다산의 학문적 기초가 초서와 필사에 있다는 것을 그대로 따르고 실천하며 다산을 지켜온 윤재찬을 새롭게 보게 한다. 윤재찬의 학문적 전통을 따르고 있는 양광식은 현장을 답사하면서 직접 기록에 보이지 않는 것을 우리에게 전하여 주고 있고, 다산의 제자, 다산학단의 저술과 그 유적을 우리에게 전하여 주고 있어 이 시대의 살아있는 ≪다신계≫의 계원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신계≫가 신뢰를 바탕으로 계를 만들었듯이, 강진의 차인들은 강진차인연합회를 만들어 강진차문화산업을 이끌어 갈 방안을 함께 협의할 단체를 만들었다. 또한 ≪다신계≫가 차를 공동 생산하던 그 전통에 따라 '강진다산명차'라는 지역통일 브랜드를 만들었다. 이렇게 볼 때 ≪다신계≫의 정신을 이어가는 문화사적 전승은 강진 지역의 모든 차인들이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편 ≪다신계≫의 산업적 전승은 문화적 전승보다 앞서나가지 못하고 있다. 산업을 바탕으로 하지 않는 문화는 모래위의 집이라고 할 수 있다. 2007년부터 시작된 '백운옥판차'의 복원과 2014년부터 시작된 다산의 떡차 복원이 그 시작점이라고 할 수 있다.
 
강진은 전국에서 가장 넓은 자연상태의 차나무가 존재하는 곳이다. 그리고 국내에서 유일하게 강진야생수제차품평대회가 열리는 곳이다.  그러나 이와같은 좋은 인프라를 적극 활용하지 못하고 늘 지역의 잔치로 끝나고 있다.
 
다산이 우리차산업의 새로운 시작을 열었듯이, 강진이 가지고 있는 차의 역사성과 환경적 가치성을 새롭게 인식하여야 한다. 강진 차인들이 전국의 차인들과 마음을 합하여 이 시대의 다산이 되면, 우리 차문화산업 또한 침체일로의 국면에서 새로운 궤도에 오르게 될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