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로] 친구의 영전에
[다산로] 친구의 영전에
  • 강진신문
  • 승인 2018.08.14 1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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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한_수필가·농민

-태어나기 이전에 너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었다. 이 사실을 부정하거나 고민하는 사람은 없다. 그렇다면 언젠가 네가 이 세상에서 죽어 사라져야 한다는 것은 태어나기 이전으로 돌아간다는 것인데 왜 슬퍼하고 고민하는가. -<해즐릿>

모내기가 한창이던 지난 어느 날 저녁 무렵 마을 친구의 트랙터 사고 소식을 들었다. 곧바로 현장에 도착하니 그는 벌써 119 구급차로 실려 가고 난 뒤였다. 그 길로 병원으로 향했다. 몇 년 전 형님께서 경운기 사고로 갈비뼈 11대가 부러지는 사고가 났었다. 그때 의사가 급한 소리를 했다. 기흉 이라는 것이다. 교통사고에서 가장 많이 일어나는 현상인데, 부러진 갈비뼈가 날카로워 그것이 폐를 뚫으면 죽는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컴퓨터의 x레이 화면을 가리켰다. 그의 말대로 갈비뼈 하나가 폐와 맞닿아 있었다. 그때 만일을 대비해서 구급차에 인공호흡기를 갖추고 광주의 종합병원까지 갔었다. 그리고 휴일인데도 흉부내과 의사를 불러내어 치료를 했다. 그래서 그때와 같은 경우이면 그렇게 조치를 취하려는 생각이었다. 병원문을 밀고 들어서니 응급실 병상위에 그가 반드시 누워 있었다. 둘러서 있는 식구들을 제치고 손발을 만져 보니 이미 싸늘했다. 운명한 것이다. 의사에게 자초지종을 듣고 병원문을 나서는데 발이 헛디뎌졌다. 내려오면서 운전대를 자꾸 고쳐 잡았다.

전날 친구와 점심을 같이했었다. 그런데 술이 한잔 들어가자 그가 예전엔 하지 않던 말을 했다. "어야, 이제 우리도 많은 세월을 살았네. 자네들도 알다시피 나는 중년에 친구 보증을 잘못 섰다가 전 재산을 날리고 빚더미 위에 앉았었네. 그런데 작년까지 해서 빚을 모두 다 갚았네. 농기계 융자금까지도. 금년부터는 나도 이제 여유가 생기니 우리 남은 삶 해외여행도 하면서 즐기고 사세나" 했었다. 또 다시 울컥해져 차를 세워 밖으로 나와 심호흡을 했다.

그는 좋은 친구였다. 그냥 좋았다. 어떤 이유나 조건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농사일을 하다가도 흙 묻은 바지 그대로 걸어 들어오며 "어야, 술 내놓소" 했다. 그것이 좋았었고, 술좌석에 앉아 마을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미주알 고주알 입담 좋게 늘어놓는 것도 좋았다. 그는 어떤 일에서나 자기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고 배려했다. 기계치인 내가 동력분무기를 다루지 못해 전화를 할 때도, 방아를 찧다가 정미기가 고장이 나서 부를때도 언제 어디서나 곧바로 달려와 주었다. 그는 술이 한잔 들어가면 "야! 좋다, 정말 좋다"를 곧잘 연발했다. 집 뜰에 앉아 푸성귀를 안주로 막걸리 잔을 기울일 때도, 바닷가 방파제 위에서 안주 없이 소주잔을 기울일 때도, 술좌석에서는 언제나 좋다는 말을 했다. 항상 듣는 말이지만 그 말을 들으면 내 자신도 기분이 덩달아 같이 좋아지는 것을 느꼈었다.

문상을 하며 술을 따라 부었다. 그가 비스듬히 앉아 웃음을 띠고 있었다. 이것이 마지막 술잔인가 생각하니 또 감정이 복 바쳤다. 내 큰 아이와 동갑인, 상주가 되어있는 그의 아들에게 머리를 조아리면서, 이 친구가 이렇게 제 아들과 맞절을 하게 하는구나 하는 멋쩍은 생각을 했다. 그러면서도 그 아이의 눈을 정면으로 바라볼 수가 없어 고개를 돌렸다. 다음날 노제를 지내면서도, 그리고 장지에서도 슬픔은 밀려왔다. 주책이다 싶어 혀를 찼다. 늙어 가면 눈물이 말라간다고 하더니만 그것도 아니구나 싶었다.

죽음 앞에서 이토록 감정을 못 이긴 적도 흔하지 않았었다. 어떤 성인은 '삶을 깊이 이해하면 할수록 죽음으로 인한 슬픔이 그만큼 줄어든다'고 했는데 나는 거기까진 아직 못 미치는 모양이다. 참으로 죽기 전에는 몰랐었다. 그가 그렇게도 소중한 친구였던 가를.

하얀 보자기에 싼 그의 유골이 담긴 항아리가 석실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본 후 발길을 돌렸다. 산을 내려오는데 길가에 무더기로 핀 영산홍이 시들어 가고 있었다. 그 맞은편에서는 빨간 접시꽃이 이제 갓 피어나고 있고.

친구여! 죽는다는 것. 사람은 모두가 다 죽는다네. 다만 그것을 망각하면서 살아가고 있을 뿐이라네. 계절따라 피어나고 그리고 지는 저 꽃들처럼 우리도 홀연히 태어나 또 그렇게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죽어가는 것을. 모든 사람이 자신은 예외 인 것처럼 그걸 모르고 살아가고 있을 뿐이라네.

친구여! 내 아름다운 친구여! 자네와 함께했던 즐거웠던 지난날들을 소중히 간직하겠네. 부디 저 세상에서 고이 영면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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