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우진과 배우는 갑골문자 이야기<27>
김우진과 배우는 갑골문자 이야기<27>
  • 강진신문
  • 승인 2018.03.09 1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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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우진_한자·한문 지도사

편안 강


강진(康津)의 앞 글자 강(康)은 집 엄(广)과 이(隶)가 구성요소다. 이(广)는 '어느 장소나 수준에 도달하다'라는 뜻도 있지만 서체이름을 뜻하기도 한다. 붓(聿)과 전혀 무관하다고 할 수 없을 것 같다. 진(津)은 '나루터'외에 '진액(津液)'이라는 뜻이 있는 것을 보면 '진한 먹물을 머금은 붓'이 본래 뜻이 아니었나 싶을 정도다. 강진은 '편안한 나루터'이다. 여기에 운치 있는 해석 하나를 덧붙이고 싶다. '묵향(墨香)의 고을'로 부르고 싶다. 가끔 마을 속으로 들어가 보면 숨은 고수 야인묵객(野人墨客)을 만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사실 여기까지는 강진연가(康津戀歌)에 가까운 주관적인 해석이다. 강(康)의 갑골문을 보자. 어느 학자는 이 그림을 여운이 길고 울림이 깊은 악기 징의 상형으로 본다. 네 개의 점은 그 소리를 나타내는 추상적 부호라는 것이다. 반면에 곡식단을 저장하기 위해 볏집으로 세운 움막으로 보는 학자도 있다. 아무튼 둘 다 '편안함'과 잘 어울린다.

 

세울 건


'세울 건(建)자의 갑골문을 보면 길을 의미하는 행(行)과 손에 붓을 들고 있는 율(聿)로 구성되어 있음을 보게 된다. 갑골문은 그림과 그것들의 배치를 통해 메시지를 전달하는 문자다. 그림 속 행(行)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두 가지의 이야기를 뽑아낼 수 있을 것 같다. 먼저 행(行)을 동적인 개념인 '가다' '다니다'로 볼 경우 먹물 머금은 붓의 움직임, 일필휘지 하는 모습이 연상된다. 다음은 행(行)을 관념 속의 '길'로 보는 것이다. 아직 실체가 없는 구상 중에 있는 길이다. 그러면 무엇을 하고 있다는 말인가. 길을 내기 위해 설계도를 그리고 있는 모습이다. 도로건설의 계획을 세우고 대대적인 공사를 일으키기 위한 준비과정을 그려놓았다는 생각이다. 왜냐하면 건(建)자는 '세우다'외에 '일으키다'는 뜻도 함께 품고 있기 때문이다. 한 가지, 건강으로 쓸 때의 건(健)은 건(建)에 사람(人)이 추가된다. 자신을 영육으로 당당하게 일으켜 세우는 자가 건강한 사람이다.

 

바를 정


정(正)자의 갑골문은 네모(口)밑에 발을 그려 만들었다. 정(正)자는 '바르다'의 뜻으로 우리의 언어 속에 깊숙이 들어와 있다. 하지만 정(正)의 본래 뜻은 정벌(征伐)이다. 정벌은 적(敵) 또는 죄 있는 자들을 군대를 동원하여 치는 것이다. 갑골문 속의 네모는 적의 성(城)이며, 발은 정벌하기 위해 나아가는 군대를 상징한다. 발을 상형한 지(止)자는 지금은 '그치다'의 뜻으로 사용하지만 본래 뜻은 '나아가다'였다. 정벌이라는 사유와 행동에서 '바르다' '바로잡다'의 뜻이 파생된 것은 흥미롭다. 정의(正義)라는 속성 속에 타인을 고려하지 않는 강자의 논리, 독선의 논리가 있단 말인가. 정(正)은 '칠 정(征)'과 '정사 정(政)'으로 확장된다. 특히 정치(政治)의 정(政)은 정(正)에 회초리를 들고 있는 손을 상형한 복(攵)을 더했다. 민(民)의 손은 정치권력의 원천이다. 앞으로 있을 지방권력의 재편에서 어떤 큰 그림을 그려낼지 그 향배가 궁금하다.

 

에워쌀 위


'에워 쌀 위(圍)의 갑골문을 보자. 어떤 특정한 성(城)이나 지역을 동서남북으로 에워싸고 있는 군대를 상징적으로 묘사한 글자다. 이 그림에서 우리는 두 가지의 이야기와 만날 수 있다. 하나는 포위로 보는 시각이다. 정벌과 맥을 같이하는 해석이다. 다른 하나는 수비 또는 수호로 보는 시각이다. 정벌을 막아내기 위해 배치된 수비형 군대를 그렸다는 해석이다. 이 두 이야기 중 어느 것이 맞을까 논쟁하는 것은 사실 승산 없는 게임이다. 그렇지만 나는 전자에 더 마음이 쏠린다. 여기에 하나의 이야기를 더 추가하고 싶다. 그것은 팬덤과 왕따이다. 이 두 가지는 모두 '에워싸다'와 관련이 깊다. 전자가 뜨거운 시선이라면 후자는 차가운 시선으로 하는 것만 다를 뿐이다. 이 둘의 문제는 고립을 낳는다는 것이다. 팬덤이 지나치면 다양한 시각으로부터 자신을 고립시킬 수 있다. 왕따는 사람에게서 어울림의 기회를 박탈하고 고립이라는 벽속에 가둔다.

 

아이 밸 잉


사랑하는 여인이 한 생명을 품었다. 이 기쁜 소식을 널리 알리고 싶다. 그러나 말은 한계가 있다. 거리의 제한을 받기 때문이다. 다른 유용한 방법을 찾아야 한다. 문자는 이와 비슷한 요구에 응답하는 과정에서 탄생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그 다음의 고민은 아마도 '잉태(孕胎)했다'는 말을 어떻게 기호로 표상하느냐 였을 것이다. 잉(孕)의 갑골문은 여성의 몸과 태아를 그려 문자화 했다. 문자를 창안하는 과정에서 상대적으로 크게 어려움을 겪지 않았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임신한 아내, 그 모습을 사진에 담듯 그렇게 소중하게 담으면 그것이 곧 문자가 될 수 있겠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이 글자에서 신비로움과 기다림이 교차되는 가슴 벅찬 설렘을 체험하는 한 인간의 모습을 발견한다. 귀를 대고 새 생명의 맥박을 느끼면서 화룡점정, 용의 눈동자를 마지막으로 그려 넣듯 한 생명의 모습을 그렇게 그리면서 이 문자는 완성되었을 것이다. 

 

해산할 만


'해산할 만(娩)'의 갑골문은 세 가지를 상징한다. 외곽의 선은 여성의 자궁이다. 네모(口)는 태아의 머리다. 그리고 두 손은 아기를 받아내는 산파의 손이다. 궁(宮)은 임금이 사는 집이다. 귀한 걸로 치면 자녀는 임금보다 더하다. 그런 자녀가 거하는 집 그래서 자궁이라 했다는 말이 있다. 그런데 이 갑골문을 만(娩)외에 '어두울 명(冥)'과 연결하는 학자도 있다. 아니러니 하게도 이 명(冥)자는 죽음과 관련이 있다. 명복(冥福)은 저승에서 받는 복이다. 가까운 사찰에 가도 이 글자와 만난다. 바로 명부전(冥府殿)이다. 죽은 이의 넋을 극락왕생하도록 기원하는 전각이다. 명(冥)의 글꼴에서 해산의 장면을 설명하는 것은 만(娩)과 별반 차이가 없다. 다만 옛 풍습에서 분만은 햇빛이 차단된 어두운 방에서 이루어졌다고 한다. 고고지성(呱呱之聲), 세상에 나온 아기의 첫 울음소리이다. 태아의 입장에서 보면 엄마의 뱃속이 진짜 밝은 세상일지 누가 알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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