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우진과 배우는 갑골문자 이야기<26>
김우진과 배우는 갑골문자 이야기<26>
  • 강진신문
  • 승인 2018.01.26 1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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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우진_한자·한문 지도사


聽(청)과 廳(청)


들을 청(聽)
'들을 청(聽)자는 갑골문에서 보듯 큰 귀와 두 개의 작은 입으로 만들었다. 이 그림을 보는 순간 누구든 십중팔구는 '들음'을 떠올렸을 것이다. 외부의 현상이 내부의 심상으로 옮겨갈 때 인간은 거기에서 의미를 알아차리는 탁월한 능력을 타고났다. 수천년 전 문자발명가는 이러한 인간의 천성을 꿰뚫어 본 것 같다. 그들은 현대의 시각디자인의 기본원리를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는 듯 글꼴의 구도에 민감했다. 혹자는 청(聽)을 '남의 말을 잘 들으려면 마음으로는 덕(德)을 지니고 귀는 열어야 한다'고 풀이한다. 덕(德)은 덕(悳)으로도 쓴다. '곧을 직(直)'에 '마음 심(心)'이니 '정직한 마음'에서 나오는 말을 알아차려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져야 한다.'는 뜻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다산은 목민심서 이전육조(吏典六條) 제5조 찰물(察物)편에서 목민관의 역량으로 명사목(明四目) 달사총(達四聰)을 강조했다. 몸의 눈과 마음의 눈, 몸의 귀와 마음의 귀를 가지고 보고 들어야 눈 멀고 귀먹지 않는다고 했다. 다산의 가르침이 어찌 목민관만이겠는가.   
 

관청 청(廳)
관청 청(廳)은 건물(广)안에 들을 청(聽)이 들어있다. 청(廳)자는 형성자(形聲字)이다. 집을 뜻하는 글자 '집 엄(广)'과 발음을 표시하는 글자 '들을 청(聽)'을 인위적으로 조합해서 만든 글자라는 말이다. 그런데 형성자는 글자들 간의 단순한 결합 그 이상인 경우가 많다. 메시지의 효과를 최대한 끌어 올리고자 하는 의도된 조합이라는 것이다. 형성자 가운데 그런 글자는 수도 없이 많다. '청'자도 여기에 해당하는 글자 가운데 하나라고 본다. '청'을 해석하면 '사람들의 말을 귀 기울려 잘 듣는 집'이다. 글꼴은 의식의 산물이다. 생각이 거기에 미치지 못하면 그러한 글꼴은 나올 수 없다. 이 글자를 처음 고안한 옛사람은 관청의 '청'의 최우선 과제를 다른 무엇보다 '듣는 것'에 두었지 않았나 추측해 보는 것도 이 때문이다. 과거에 비해 요즘 관청은 한결 인간적이다. 듣기만 한 것이 아니고 말한 주체가 그 결과를 다시 들을 수 있도록 청(聽)의 개념을 더욱 확장시켰다. 한 가지 주의할 점은 있다. 바른말과 바르지 못한 말을 구별하지 못하면 모든 것이 허사다. 그래서 다산은 자신과 가까운 사람의 말(近習之言)일수록 사의(私意)가 있기 마련이니 믿고 들어서는 안 된다고 가르쳤다.

 

封(봉)과 禮(예)


봉할 봉(封)
봉할 봉(封)자는 손으로 나무를 잡고 심는 모습이다. 국경표시를 위해 그 경계에 따라 나무를 심는 모습으로 보는 학자가 있는 반면 천자가 제후에게 하사한 기념수를 심는 모습으로 해석하는 학자도 있다. 봉(封)은 주나라의 봉건제도(封建制度)와 관계가 깊다. 봉(封)은 상나라를 멸망시킨 주의 천자가 자신의 씨족이나 혈족에게 일정한 영지를 하사하고 그 지방의 통치자로 삼는다는 말이다. 넓은 중원을 다스릴 방법으로 친인척을 동원하여 천자를 중심 삼고 하나의 통치세력으로 묶은 셈이다. 왜 이러한 제도를 도입했을까. 혈족인 만큼 역모를 일으키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정권초기 힘이 있을 때는 안정적인 통치수단으로 작동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봉건제는 쇠퇴하고 영지는 패권 쟁탈의 본거지로 변질되고 만다. 사실 정권초기에도 천자는 하극상의 칼날을 두려워했다. 고려시대 기인제도처럼 지방 제후들의 아들들을 공부를 핑계로 중앙으로 불러들였던 것이다.
 

예도 예(禮)
주나라 청동기에 새겨진 예(禮)의 최초 글자 금문을 보자. 임금 왕(王)과 제물을 가득 담은 그릇이 그려져 있다. 왕을 중심삼고 제사를 지내는 모습을 연상시킨다. 현재의 글꼴 예(禮)는 왕(王)자 대신 시(示)자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 보일 시(示)자는 제사상에서 왔으며 신(神)을 상징한다. 한자에 시(示)자가 들어 있으면 모두 신과 관련된 한자로 보면 된다. 예(禮)자와 봉(封)자는 한 묶음처럼 관계가 깊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주나라는 중앙의 천자와 지방의 제후들이 다스린 나라였다. 그들을 묶어준 것은 친인척(혈족)이라는 끈 하나였다. 봉건제는 혈족은 쉽게 배반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에서 시작된 제도라고 했다. 그러나 믿음은 눈에 보이지 않아 믿을 수 없다. 눈에 확 들어오는 장치가 필요하다. 인질이 그것이고 또 하나의 장치가 바로 예(禮)라고 한다. 예(禮)는 천자와 제후들이 한자리에 모여 지내는 제례였다. 제사를 통해 혈족의 정을 확인하듯 예(禮)가 그러한 기능을 했다고 한다.

 

 貝(패)와 朋(붕)


조개  패(貝)
조개 패(貝)자는 재화(財貨)를 상징한다. 오늘날 재화와 관련된 한자어에 조개 패(貝)자가 들어간 것도 일찍이 조개껍질이 화폐로 사용되었던 것에서 유래한다. 고대사회에서 조개껍질을 화폐로 사용된 역사는 제법 오래되었다. 기원전 3천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한다. 조개는 갑골문의 나라 상나라(은나라로 부르기도 함)에서도 화폐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조개를 소중하게 여기는 사회현상은 상나라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고대의 여러 지역인 인도, 동남아시아, 이집트, 북아메리카에서도 조개는 화폐의 대용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조개는 물물교환의 수단으로써 경제적 가치로만 한정되지 않았다. 거의 전 세계적으로 생명, 출산, 풍요의 상징이 되기도 했다. 여기에 의례적·주술적 의미가 포함되면서 종교적 배경도 가지게 되었다.


벗 붕(朋)
벗 붕(朋)자는 두 개의 달 월(月)로 이루어진 글자다. 한 달에 한번 적어도 두 달에 한번은 만나야 벗이라고 할 수 있어서였을까. 요즘도 모임은 월례회의가 대세이지만 격월로 만나는 경우도 흔하다. 하지만 벗 붕(朋)자는 월(月)이라는 시간적 개념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고 한다. 갑골문 철탑을 연상시키는 이 그림을 보고 학자들은 오랫동안 이 그림이 어떤 글자와 연결되는지를 알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우측에 있는 청동기에 새겨진 금문을 발견하고 나서야 이 그림이 붕(朋)자 임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물론 이 금문을 아이 영(嬰)자로 보는 학자도 있다. 상나라 당시 붕(朋)은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벗의 차원을 넘어 부와 권력을 누리는 우월한 지위에 있는 사람들이었다고 한다. 그들은 왕의 혈족이자 최측근으로서 통치자금을 관리했으며 왕명을 전달하는 역할을 했다고 한다. 왕과 붕 그리고 제후들은 혈족으로 맺어진 끈끈한 통치집단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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