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마지막으로 황상은 어떤 사람이었는가?
[특집] 마지막으로 황상은 어떤 사람이었는가?
  • 강진신문
  • 승인 2017.10.20 14:5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황호만의 강진 다시보기] 황상(黃裳)의 일속산방(一粟山房) < 3 >

뒤늦게 중앙시단에서 활략했으나 모두가 황상의 시심에 감탄하다.

다산과 정학연 형제 외에도 당대 많은 사람들이 호평한 바가 있으며 당대 1급의 쟁쟁한 문인들과 함께 참여하게 되었다. 이들은 스승 다산을 향한 황상의 도타운 마음에 감동하다가, 그의 시를 보고는 다시 한 번 깜짝 놀랐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시명을 높여 준 그들은 다산 정약용과 추사 김정희와 정학연과 혜장을 통해 초의와 사제의 인연을 맺었으며 이 일을 계기로 초의선사와도 두터운 인간관계로 큰 힘이 되었다. 그 이면에는 황상의  시문이 남다른 독특한 내면이 내포되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정학연이 황상을 위해 다시 써준 「삼근계」 친필 글씨.
그 중 대표적인 몇 사람의 사례를 살펴보면 "이재 권돈인(權敦仁)(1783~1859)이 자신의 집으로 황상을 초청했다. 권상하의 5대손으로 영의정까지 지낸 예관의 거물이었다.

황상은 황송해서 권돈인에게 큰절을 올렸다. 황상은 주눅이 들어서 쩔쩔맸다고 했으며 영의정을 지낸 나라의 큰 어른이 먼 시골 아전의 자식을 기억하셨다 직접 초대해서 황상에게 따뜻한 말씀을 전하였으며 극찬을 했던 그 이면에는 황상의 절박하고도 웅숭깊은 마음의 자세와 그의 시문이 보여주는 깊은 울림 때문이라고 했으며 다산의 그 많은 제자 중 수제자라고 널리 알려져 있으며 정학연의 소개를 통해 그가 고유하던 장안의 명사들에게 널리 알려져 큰 화제를 낳았다고 했다. 모든 사람들은 지금 이 세상에서도 그런 이가 있느냐며 놀라워했다.

열다섯에 다산을 처음 만난 이후 40년을 자취 없이 묻혀 살던 황상은 쉰여덟에서야 뒤늦게 중앙시단에 데뷔하여 존재감을 서서히 드러내기 시작했다.

추사는 쉰다섯 살이 되던 1840년 9월에 제주도 귀양을 떠나 장장 9년의 세월을 그곳에서 보냈다. 그가 유배에서 풀려난 것은 예순 셋이었다.

추사는 제주에서 우연히 시 한 수를 보았다. 시를 읽자마자 그는 다산의 제자가 지은 작품임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시는 황상의 작품이었다. 추사는 그 시의 풍격을 평가했다.

두보의 시를 골수로 삼고 한유를 근골로 삼아 튼실하고 웅숭깊은 시라고 칭찬했으며 황상에 대해 부쩍 큰 호기심이 생겨 추사는 귀양에서 풀려나 뭍에 도착하는 즉시 그를 만나러 백적동 그의 집까지 물어물어 찾아갔다.

하루빨리 서울로 가고 싶은 마음을 누르고 굳이 황상의 집부터 방문한 것을 보면 황상의 시와 그에 대한 퍼진 풍문을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해 보고 싶은 욕망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황상은 세 번째 상경 차 두릉(남양주)으로 정학연을 만나러 올라간 직후였다.

결국 이때 두 사람은 만나지 못했다.

다산과 추사에 얽힌 인연으로 황상과의 교분이 40년 만에 다시 이어졌다. 다산을 정점으로 당대 최고 명류들의 인연이 종횡으로 그물망처럼 얽히는 광경은 보기에도 아름답고 큰 나무 한그루의 그늘이 이리도 넓었다.

추사 김정희(金正喜)(1786~1856)는 서문에서 황상이 다산의 가르침을 따라 당나라 두보와 한유, 송나라 소동파와 육유 등 사가의 시만을 50년 넘게 익혀서 마침내 자기만의 독창적 언어를 수립한 것을 높이 평가했다.

스승에게 배웠지만 스승과 조금도 같지 않고, 시가를 배웠으되 하나도 닮지 않았으니, 그야말로 제대로 배우고 훌륭히 익힌 결과라 했다. 한무제 때 장건처럼 스승은 저 하늘로 떠나신 지 이미 오래다. 꿈속에서 스승을 뵙고 '몽곡'시를 짓기도 했지만, 꿈을 깨자 스승은 더 이상 내 곁에 계시지 않았다.

세상을 뜨시기 며칠 전 흔들리는 붓으로 써 주신 스승의 절필(絶筆)은 황금과도 바꿀 수 없으며, 스승의 고귀한 가르침을 후손들에게까지 끊임없이 대대로 지켜갈 것입니다. 그는 산속 집에서 지난날의 회억에 젖어 조용히 지냈다. 그렇게 그는 다시 세상에서 잊어진 사람이 되었다.

치원소고에 수록된 시가 무려 315제 365수나 된다.

황상은 깨어 있는 순간 선생님 생각만 합니다.

이런 못난 제 마음 만져 주시려고 꿈에 잠깐 다녀가셨군요.

아무 이룬 것 없이 선생님 제자가 말하기도 송구하지만, 부끄럼 없이 살겠습니다. 떳떳하게 살겠습니다. 고맙습니다.('시 일속산방으로 돌아가는 처사 황치원을 전송하며'에 잘 그려져 있다)

한사람의 생애를 복원하는 일은 결코 쉽지가 않다.

그래도 어디선가 깊이 간직되어 있던 황상의 자료가 이제 햇빛을 볼 날을 기대한다. 우리 강진의 유산(遺産)이 아닐까 다산연구회 이사장 박성무 씨와 한양대 정민 교수의 자문을 받아 흙에 묻힌 구슬을 발굴했으며 하는 부언(附言)을 드린다. <끝>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