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다산이 돌아가자 황상은 백적동 일속산방으로 가다
[특집] 다산이 돌아가자 황상은 백적동 일속산방으로 가다
  • 강진신문
  • 승인 2017.09.15 1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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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호만의 강진 다시보기] 황상(黃裳)의 일속산방(一粟山房) <2>

다산선생의 최고의 제자는 누구였을까, 다산선생의 제자중에서 대부분 황상을 꼽는다. 지역출신으로 다산선생이 고향으로 돌아가자 선생의 가르침대로 일속산방을 짓고 생활했다.

이런 황상을 지역문화로 이끌어 내야하는 시점이다. 이 시기에 황상을 다시 한번 되짚어본다.
<편집자 주>

 

노규황량사는 추사 김정희가 유배에서 풀려 해배되던 1848년 이후에 쓴 것으로 윤종진을 통해 황상에게 써 보내졌다. 기장으로 지은 밥과 아욱 국을 나타내는 말로 고결한 선비의 거처라는 뜻이다.

다산과 해배(解配)이후 10년만의 만남 그때가 마지막 작별이었다.

꽃 진 자리에 새 잎이 돋고 낙엽지더니 흰 눈이 쌓였다.

백석산 자락 황상의 거처는 1년 내내 태고의  적막처럼 고요했다. 그는 꽃을 가꾸고 틈틈이 초서와 시를 지었다. 그래도 적적하면 근처 정수사로 건너가 암자에 틀어박혀 며칠씩 불경을 읽었다. 지난날을 생각해보면 예전 스승께서 내 시를 보고 이렇게 칭찬하신 적이 있었다.

상아! 네 시에는 당나라 때 원결(元結)의 호방한 기상이 넘치는 구나 세속의 굴레를 훨훨 벗어냈던 인물이었다. 그와 나를 비교하다니!

황상은 부모님이 연로하시다는 핑계로 벼슬을 버리고 백적산으로 들어가 책을 벗 삼아 맑게 한 세상을 건너갔던 황상이었다. 스승께서 나의 시를 그와 견주시니 그 말씀만으로도 겨드랑이 밑에 날개가 돋는 듯 했으며 구름을 갈고 달을 낚시질 하며 이슬에 젖어 잠들고 바람을 맞으며 밥을 먹었다고 했다. 그는 일찍이 하루도 서시를 폐한 적이 없었으며 능히 삼여의 여가에 힘을 쏟으니 의연히 절로 태곳적 일민이라 하겠다.

나이가 더해갈수록 기운이 쇠하자 다시 일속산방 뒤편 골짜기의 물기 끊어진 곳에 집 한 채를 더 지어 편안히 몸을 기르며 삶을 마칠 장소를 선택했다.

늙어서도 공부를 열심히 하는 노학생이 사는 암자다. 일속산방은 추사가 직접 지어준 이름이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남쪽에 일속산방이라는 이름을 내걸었다.

30년이 지난 시점에 집 뒤편 골짜기 언덕에 새롭게 지은 작은 산방을 경영하게 된 계기를 길게 술회했다.

다산이 황상을 위해 써 준 '제왕상유인첩'을 두고 '장취원기'라 불렀다.

황상의 일속산방을 완공한 것을 제일 먼저 축하한 사람은 다산 정약용의 아들 정학연이었다. 황상이 대구면 용운리 백적동으로 들어온 것은 다산의 해배 직후인 1818년의 일이었다. 이후 30년간 집짓고 땅을 일궜으며 예순둘이 된 1849년에 황상은 자신만의 공간을 가꾼 일속산방이다.

다산의 맏아들 정학연이 황상을 위해 써준 「일속산방으로 돌아가는 처사 황치원을 전송하는 서문」

황상은 다산과 처음 만나 '삼근계'의 가르침을 받은 것이 1802년 10월이었다. 저같이 머리 나쁜 아이도 공부 할 수 있나요? 하며 쭈뼛대던 소년은 불과 3년 반 만에 스승의 형인 정약전이 월출산 아래 이런 문장이 나타나다니 놀랄 만큼 훌쩍 성장해 버렸다고 하던 지난날이 한없이 그립다며 술회(述懷)했다.

황상이 일속산방을 완공한 것을 축하한 내용이다.

해묵은 소원을 이때 이루었다고 적었다. 위 글은 1855년에 황상이 보낸 시 「일속산방」이 이루어져 유산 대로를 그리며 정학연이 2수를 받고 쓴 편지다. 첫수만 읽는다.

몇 해 전 두릉에서 밤비가 내릴 적에
선생께서 내 마음의 생각을 알곤 놀라셨지
내가 일속산방을 짓겠다는 뜻을 말하자
선생께서 놀라며 말씀하셨다.
그대가 어찌 내 마을 말하는 가?(중략)

그러는 동안 세월이 10여 년이 지나 1836년 2월 22일 다산의 회혼연의 날이었다. 부부는 어느새 결혼 60주년을 맞이했다.

매서운 날씨에도 열흘을 넘게 걷고, 길을 묻고 물은 끝에 남양주 능내리 다산 선생의 집에 당도했다. 막상 스승 앞에 서자 머릿속이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았다. 어정쩡하게 서서 큰 절을 올렸다. 황상은 스승 앞에 엎드린 채 어깨를 들먹였다.

오래 그리던 제자와의 갑작스런 상봉으로 감정이 주체하지 못한 채 일렁였던 것일까?

건강이 좋지 않아 회혼연이 취소되었으며 황상은 스승의 환후가 제 탓인 것만 같아 마음이 불안했으며 우환이 있는 집에 오래 머무는 것은 경우가 아니라 생각했다. 며칠간이지만 약수발을 정성껏 해드리고 내일 새벽에 내려가기로 했다. 이것이 마지막 작별이 되리라는 것을 두 사람은 알고 있었다.

건강이 좋지 않은 상태에도 다산의 꼼꼼함은 제자가 먼 길을 돌아갈 때 배를 곯을까봐 여비까지 따로 챙겨주었으며 황상은 못난 제자에게 주려고 의식이 혼미한 중에도 힘겹게 글씨를 썼을 스승을 생각하며 울음을 삼켰다.

떠나올 때 '규장전운'을 왜 짐 속에 넣었는지 알겠는가?

먹과 붓도 이제라도 그간 접어두었던 시 공부를 다시 시작하란 뜻이네 스승의 눈빛은 이미 허공에 맴돌고 황상은 대답도 못하고 꾸러미를 안고 울음을 삼키고 19일 물러나 왔으며 정학연 형제의 배웅을 받고 작별하였다.

다산은 회혼을 잡아놓은 잔칫날 2월 22일 아침 8시에 세상을 떴다.

가장 기쁜 날이 가장 슬픈 날이 되었다. 그 이후 스승께서 세상을 뜨신 지 10년 그동안 선생님 기일마다 멀리 두릉쪽을 바라보며 곡을 했으며 미루어두었던 시공부도 더 열심히 하여 중앙 무대의 발판을 넓혀갔다. 두 번째 남양주 내왕시 정씨와 황씨의 두 집안끼리 정황계(丁黃契)를 맺기로 했다. 돈독한 의리를 서술하여 대대로 우의를 이어갈 수 있도록 증서를 만든 것이 정황계첩이다. 황상의 「치원유고」에도  「정황계안」이란 글이 실려있다.

황상은 머나먼 천 리 길을 살아생전 다섯 번의 내왕이 있었다.

차도 없던 그 시절 얼마큼의 인과 관계였기에 다섯 번의 내왕이 있었을까.

상상해보면 두 가정의 정신적 믿음 때문이며 상상을 초월한 인간관계 때문이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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