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에 주의보가 내려졌다. 어떤 지역은 경보가 발령 중이다. 연일 최고 기온을 갱신하고 있다니 여간 반갑지가 않다. 실제로 창문 가까이 가니 불길이 이글거리는 것처럼 열기가 대단하다. 밤에도 찜통더위는 물러갈 줄 모른다. 한옥에 사니까 시원할 거라고 얘기하는 사람도 많지만 올 여름 더위는 봐주는 게 없는 것 같다. 덥기는 마찬가지이다. 마당의 금잔디도 목이 타는지 더욱 노래졌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오래된 동백나무가 무성한 그늘을 드리우며 땡볕을 물리치고 있다는 사실이다. 참새며 까치, 이름 모를 새떼들이 나무 밑으로 모여들고 있으니 말이다. 창가에 서서 한참을 바라보았다. 서로가 많이 지친 모양이다. 날갯죽지가 푸석해 보이기까지 하였다.

불볕을 뒤집어쓰고 있는 깡마른 저들에게 목을 축일 물 한 모금이 절실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새들의 눈빛이 그렇게 얘기를 하고 있었다. 바로 실행에 옮겼다. 장독대로 달려가 적당한 그릇을 찾았다. 새하얀 사발에 냉수 한 바가지 부어 그늘이 좀 더 짙은 쪽에 갖다 놓았다.  

새떼가 물을 마시기를 기다렸다. 한 시간이 지나고 또 한참이 흘러갔다. 내가 더 애가 탔다. 새들이 굽 주변만 뱅뱅 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절가웃이 지나갔다. 여전히 사발의 물은 그대로다. 풀죽은 새떼를 위해 베푼 알량한 나의 선행이 수포로 돌아갈 조짐마저 보이고 있었다. 뭐가 잘못된 것일까.

우리 집 한옥 처마 밑에는 돌확이 둘 있다. 그 옆에선 삼복더위에도 기죽지 않는 선홍빛 봉숭아꽃이 해마다 운치를 더하고 있다. 돌확에는 금붕어가 노닐고, 어리연이 노랗게 피어 있다. 가끔 말벌이 날아와 물구나무를 선채로 물 한 모금 훔쳐 물고 어디론가 줄행랑을 치기도 한다. 창문 틈으로 지켜보면 참새가 조심스럽게 다가와 물을 마시고 가는 모습이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왜일까. 동백나무 아래 사발의 물은 왜 그대로일까. 유심히 살펴보니 새떼가 날아와 파닥파닥 사발의 등을 타고 올라가 그 입술에 앉으려고 시도는 하고 있었지만 번번이 무위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게 문제였다. 물가에 깃을 접고 앉을만한 곳이 마땅찮았던 것이다. 매끄러운 사발이 발붙일 품 한쪽 내주지 않아 딛고 설 자리가 없었던 셈이다. 어느새 새떼의 길어진 부리에 소금꽃이 피고 있었다.

사발은 보기에는 좋다. 정화수가 떠오르기도 한다. 그런데 사발의 입술은 너무 미끄럽다. 전깃줄은 발가락으로 감고라도 올라설 수 있지만 사발은 그럴 수가 없다. 게다가 폭이 좁고 깊어 새가 그 속의 물을 마시기에는 적당하지도 않다.

물수제비뜰 수도 물론 없다. 동백나무 그늘 아래 새떼는 그래서 사발 주변만 서성거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진즉 접시 물로 바꿔줬어야 했다. 얼렁 시원한 물 한 모금 입에 물고 솟구쳐 오르는 모습을 보고 싶다. 허공만 쪼아 대다 포르르 날아간 새떼의 눈가에 아직 물그림자가 어른거리고 있으니 말이다.

우리네 삶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높은 담을 쌓아 이쪽저쪽, 내 편 네 편을 너무 나누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울타리를 둘러치고 사는 것보다는 적당히 낮춰야 사람이 모이고 새록새록 정도 돈독해진다. 생각의 빗장도 마찬가지이다. 살짝 풀어놓았을 때 틈이 생기고 상대도 부담 없이 다가온다.  

아파트 문화 때문일까. 주변을 둘러볼 여유가 없어서일까. 요즘은 모두가 닫고 산다. 사발 속의 물처럼 갇혀있다. 스스로를 가두고 산다. 그건 사생활이니 뭐라 말하기 어렵다. 성격 탓일 수도 있어 나무랄 수도 없다. 그래도 서로가 마음의 담장만은 쌓지 않았으면 좋겠다. 허물면 눈에 들어온다. 저편도 보인다. 앞으로 더 열고 살 작정이다. 생각이 열려 있었다면 새들 편에서도 생각을 해봤을 것이다.

사발처럼 하얗고 번지르르 한 것 보다는 키 작고 거칠거칠한 접시가 때론 더 쓸모 있다는 것도 미리 알았을 것이다. 이번 사기 사건은 욕심만 앞섰지 근본적으로 상대에 대한 배려가 부족해 생긴 일이었다.

그랬다. 내가 새떼가 되어 보니 눈에 보였다. 역지사지, 입장을 바꿔 바라보니 생각이 달라졌다. 얄팍한 입술에 갇힌 속 좁은 물보다는 경계를 짓지 않는 접시 물이 낫다는 걸 나 문득 새떼가 되어 깨우친 그런 여름 한낮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