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병영성 축성 600주년을 기념하는 제20회 전라병영성 축제가 오는 21일부터 사흘간 병영면 일원에서 진행된다. 이번 행사는 1417년 광주에서 병영면으로 이전한 전라병영성이 축성 600주년을 맞이하는 것을 기념한다. 의식행사로 전라병마 절도사 입성식 재현행사를 비롯해 전라병영기 게양식 등이 진행된다. 이번 축제의 가장 핵심은 공존의 역사의 메아리라는 주제로 초대 병마절도사 마천목 장군과 무병병사의 진혼제라고 할 수 있다. 초대 병마절도사를 지낸 마천목 장군에 대해 다시 되짚어본다. /편집자 주 

   
 
제20회 전라병영성 축제.... 병영성 축조한 초대 절도사 마천목 장군 재조명

마천목(馬天牧, 1358~1431)장군은 서기1358년(고려 공민왕 7년) 7월 25일 장흥부 회령현 모원촌(現 보성군 회촌면 모원리)에서 태어났다. 장군이 태어난 지 3일째 되던 날 부친이 우연히 집 앞 우물에 떠있는 오동나무 잎을 보았고 벌레가 갉아먹은 잎에 한자로 천목(天牧)이라 새겨져 있어 아들 이름을 마천목이라 정했다고 전해오고 있다.

마 장군은 어려서부터 재능이 뛰어난 인물로 평가받았다. 나이 5세에 경서(經書)와 무예를 배우기 시작하니 재예(才藝)가 총명하여 스승의 칭찬이 자자했다고 한다. 나이 11세에 경서(經書)와 사기(史記)에 널리 통달하니 향리(鄕里)에서 장차 크게 성공할 사람으로 모두가 인정했다.

마 장군은 나이 15세에 부모님과 같이 곡성군 오지면 당산촌으로 이사했다. 이 때 또래에 비해 신체가 강건하고 힘과 무예가 출중했다.

나이 17세에 섬진강 상류 두계천에 얽힌 전설이 전해져 내려온다. 마 장군은 날마다 마을동쪽 10리 밖 순자강(現 섬진강) 상류 두계천(杜溪川)에서 은어를 잡아 정성으로 부모님을 봉양하며 효도하며 살고 있었다. 어느날 해가 지도록 고기를 잡다가 어둠이 깔린 강 길을 따라 집으로 걸어오는데 푸르고 동그란 예사롭지 않은 돌이 보여 주워가지고 와 방에 두고 잠이 들었다. 잠을 자던 중 심상치 않은 기운에 눈을 떠보니 수 많은 도깨비들이 방안 가득 들어와 "부원군 대감께서 초저녁에 주워 오신 돌은 범산에 사는 저희들의 대장이오니 제발 돌려주시기 바랍니다" 라고 했다. 마 장군은 "나의 청을 들어주면 너희 대장을 돌려주마!" 라고 말하고, "순자강에 어살을 막아 고기를 많이 잡아서 부모님께 드리고자 하니 어살을 막을 달라"고 하였다.

도깨비들이 집을 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아 돌아와서 "부원군 대감! 어살을 다 막았으니 저희 대장을 돌려주시기 바랍니다" 하니 마 장군이 돌을 돌려주면서 다시 물어보았다. "너희들은 어찌 나 같은 서생에게 부원군 대감이라 하느냐?" 라고 물으니 도깨비들이 "앞으로 부원군 대감이 되실 분입니다" 하고 물러갔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나이 21세에 목사(牧使) 이빈(李彬, 본관 경주)의 딸과 혼인한 마 장군은 나이 24세에 산원(散員) 정8품 무관에 임명된다. 이후 나이 37세에 사직(司直) 정5품 무관에 승진했고 나이 41세에 제1차 왕자의 난을 평정하는 공을 세웠다. 나이 42세에 절충장군 정3품에 승진해 상장군(上將軍)에 임명되었고 나이 43세에 태종을 도와 박포의 난, 제2차 왕자의 난을 평정했다.

이에 44세에 좌명공신(佐命功臣)에 서훈되고 동지총제(同知摠制) 종2품에 보임된다. 이어 마 장군은 나이 55세에 전라도병마절제사 판(判)나주목사(全羅道 兵馬都節制使 判羅州牧使)에 부임하고 나이 59세에 도총관(都摠管)으로 전라도 병마절제사에 재임했다.

마 장군은 나이 60세에 광산현에 있는 전라병영을 남해안 왜구가 오르내리는 길목에 옮기는 것이 국방상 편리함을 임금에게 아뢰어 강진의 수인산 아래로 옮겨 병영성을 축성했다. 이후 마장군은 정헌대부 병조판서, 집현전 대제학 겸 삼군부사, 의정부 영의정 등을 역임했다.

마 장군은 서기 1431년(세종 13년) 음력 1월 25일 나이 74세로 별세했다. 세종대왕은 부음을 듣고 예관을 보내 치제케 하고 법에 따라 부의를 내리게 했다. 유명한 풍수를 보내 보성군 석곡면 방주동 통명산 매봉에 예장(禮葬, 現 국장)으로 장례를 하게 하고 시호를 충정(忠靖)으로 내리고 부조묘를 명하셨다.

마 장군의 유물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에 거의 소실되고 현존하는 유물로 1401년 발행된 보물1469호 '마천목좌명공신녹권(馬天牧佐命功臣錄券)'과 교지가 있고 현재 우리나라에 하나뿐 인 고문서로 학계에 전해오고 있으며 세종대왕의 친필 왕지(王旨) 사본이 있다. 교지와 왕지는 국사편찬위원회 유리 건판에 보존되어 있고 좌명공신 녹권 원본은 국립고궁박물관에 위탁보관하고 있다.

마 장군이 축성한 병영성은 1991년 지표조사를 시작으로 1997년 4월 18일 국가사적 제397호로 지정됐다. 병영성은 발굴조사 결과를 토대로 복원 및 정비계획을 수립하여 남문 옹성부분을 복원하는 등 1999년부터 본격적인 복원공사에 들어갔다. 1천60m에 이르는 성벽 복원 및 남, 서, 동, 북문루 복원이 완료되었고 최근에는 성 내부 발굴조사를 완료하여 여수 진남루 규모의 객사 건축물의 복원을 위해 준비하고 있으며 성 외부에 발굴된 해자 또한 복원을 준비하고 있다. 

  

마천목좌명공신 녹권

마천목좌명공신녹권은 1401년(태종1년) 공신도감에서 절충장군 웅무시위사상장군(折衝將軍 雄武侍衛司上將軍) 마천목(馬天牧)에게 발급한 문서이다.

마천목 장군은 조선초기 제2차 왕자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운 사람에게 내린 공신호로 마천목은 후에 태종(1367-1422)이 되는 정안군을 도와 난을 평정하는데 앞장섰다.

태종은 태조가 즉위한 직후 태조개국공신(太祖開國功臣)을 책봉한 예를 좇아 자신을 도운 47명의 공신을 선정하여 좌명공신(佐命功臣)으로 칭하(稱下)하고 4등급으로 나누어 포상(褒賞)하였는데 이 때 마천목은 3등 공신으로 녹권을 받았다.

   
1401년(태종1년)에 마천목 좌명공신에게 발급된 녹권으로 전체규격은 39x570cm이며 좌명공신 47명에게 발급되었으나 현재 우리나라에 단 하나뿐인 고문서(古文書)로 보물 1469호에 지정되었다.

마천목 좌명공신녹권은 좌명공신 47명에게 발급된 것 중의 하나로 현재까지는 유일본이다. 조선초기에 사급된 개국공신녹권 및 개국원종공신녹권과 비교해 볼 때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 출납(出納)에서 의정부(議政府)의 관(關)으로 바뀐 것 이외에는 서식(書式)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어 공식녹권의 체제나 양식변화를 알 수 있는 자료이다.

 또한 공신호의 부여와 등급별 포상내용, 특전 등은 공신관계 연구 자료로서, 공신도감 구성원은 공신도감의 조직 및 운영관계를 파악할 수 있는 자료로서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조선초기에 지정된 녹권들이 대부분 원종공신녹권이며 이화개국공신녹권(국보 232호)만이 정공신 녹권이란 점을 상기하면 마천목 좌명공신 녹권은 역사적으로나 학술적으로 대단히 가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