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기행-마량면 영동리 영춘마을
마을기행-마량면 영동리 영춘마을
  • 김철 기자
  • 승인 2002.08.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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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기행 마량면 영동리 영춘마을〈80〉

낚시꾼들의 행렬이 끊이지 않는 마량, 등대를 앞으로 길게 늘어선 방파제에는 여기,저기 자리한 수많은 낚시꾼들이 저마다 월척을 꿈꾸며 짜릿한 손맛을 즐기고 있다. 낚시꾼들의 힘찬 손짓을 뒤로 마량항에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해 바다가주변에서 뱃일대신 농사를 짓고살아가는 영춘(永春)마을을 찾았다.
현재 17가구의 40여명의 주민이 살고있는 영춘마을은 영동제저수지로 인해 수몰됨에 따라 마을주민들의 대부분이 지난78년 가약산 기슭인 말모리등으로 이주한 상태이다.
두루봉아래에 위치해 산동마을에 속해있던 영춘마을은 해방과 함께 영동에서 영춘마을로 분리됐다. 해남윤씨가 처음 뒷마을 영동에 터를 정할 때 주위의 지형이 산의 동편에 위치해 산동(山東)이라 불리게 됐다.
말을 몰고 달리는 형태를 나타내고 있는 영춘마을에는 주변의 산과 들판이 각각의 이름으로 향토성을 짙게 풍긴다. 산정상에서 바라보면 제주 한라산이 보일정도로 높은 산이였다는 두루봉, 예전 남호 성머리에서 활을 쏘는 과녁판이라하여 이름지어졌다는 가역산, 바위밑에 숨어서 난을 피할수 있어서 붙여졌는 덤밧산, 돌에 연지를 찍어놓은것처럼 붉게 반점이 생긴 각시바우, 덤바산중에 샘물이 두곳에서 솟는다고해서 형제샘, 서당이 위치해 학문을 닦아서 붙여진 딱구제, 샛골을 올라가면서 사다리처럼 생긴 새다리골, 나무나 풀을 베러 다니던 사람들이 더위를 식히기위해 등목을 했다는 등치기골, 예전에 윤씨일가가 살았다는 큰터, 용이 하늘로 올라간다는 용배등이 운치를 더한다.
영춘마을에는 문화적가치가 높은 두곳이 자리하고 있다. 유사시에 대비에 전국비상연락망 구축방법으로 봉화불을 이용했던 봉화대가 봉대산 정상에 아직도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이 봉화대는 6·25전쟁직후에 까지 사용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또 마을앞에 위치한 고인돌군이 있다. 곡부공씨 민묘와 함께 자리하고 있는 23기의 고인돌은 무질서하게 분포되어있고 지석이나 상석으로 보이는 돌들이 많이 나타나고 있다. 현재는 관리가 되지 않는 상태에서 길게 자라난 잡초로 인해 외관상으로 모습을 찾아보기 힘든 실정이다.
영춘마을에 들어서자 마을과 함께 생활하고 있는 당산나무가 먼저 눈에 띄였다. 마을앞으로 흐르는 영동천옆에 위치한 당산나무는 바쁜 농사일로 힘들어하는 주민들에게 휴식터를 만들어 주고 있었다.
영동천에서 나오는 시원한 물소리와 인근 산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당산나무가 만들어주는 그늘은 주민들에게 최고의 안식처로 충분했다.
당산나무가 반겨주는 마을입구에는 새로 만들어 지고 있는 마을회관공사로 인해 공사인부들이 손길이 바빠보였다. 이달말 완공을 앞두고 창고공사가 한창인 가운데 당산나무 아래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던 주민들을 만나볼수 있었다.
주민 정행진(81)씨는 “저수지를 막으면서 이곳으로 이주하게 됐다”며“이곳도 물맑고 주변환경이 좋아 살기좋은곳이다”고 웃으며 마을을 홍보했다. 정씨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사이에 옆에 있던 아주머니 일행들은 언제 가져왔는지 소주 한병에 세상사는 이야기에 빠져있었다. 마을주민들과 마을의 유래에 대해 얘기를 나누다 일어서자 이경자(59)씨는 “마을회관을 열때 선물사가지고 꼭 오라”며“싼 것은 않되고 가격이 나가는 것으로 사야된다”는 당부에 웃음으로 대답하고 자리를 나섰다.
한눈에 들어오는 영춘마을에는 이색적인 것이 눈에 띄었다. 집에 문패대신에 시멘트로 만든 대문옆 기둥에 바로 이름을 새겨놓은집이 몇집이 눈에 들어왔다. 낙서로 생각하고 바라본 담에는 정자로 쓰여진 집주인의 이름과 주소가 적혀있었다.
오지의 마을로 유선방송을 달지않는한 정상적인 TV시청이 힘든 영춘마을은 미맥위주의 농사외에도 마을위에는 목축업을 병행하고 있어 농촌생활의 점진적인 변화를 꾀하고 있다.
마을의 규모는 작지만 주민들에 대한 서로의 마음이 크다고 밝히는 영춘마을주민들의 말처럼 항상 자신에 처해진 현실에 만족하고 살아가려는 긍정적인 사고방식을 배울 수 있는 경험을 하게 됐다.
영춘마을출신으로는 광주국세청 징수과장으로 근무하는 김화덕씨, 서울 잠실체육관에서 근무하는 김득수씨, 마량면사무소 총무계장으로 재직중인 정일선씨가 이마을출신이다.



한소쿠리의 도라지를 들고 마을주민들이 모여있는 당산나무 휴식터로 나온 김기순(74)씨를 만났다.
군동 평리에서 20살 때 시집온 김씨는 “80여평의 밭옆의 짜투리땅에 심은 도라지를 가지고 나왔다”며“껍질을 벗겨서 텃밭에 나오는 채소와 함께 5일장에 가지고 나가서 팔려고 한다”고 말했다.
김씨는“예전에는 먹을것이 없어 굶어 죽는 사람이 생길 정도로 궁핍한 생활을 했다”며“그때에 비하면 지금은 살기좋은 세상이다”고 웃었다. 저수지공사로 이주하게된 후 생활의 변화에 대해 김씨는“거의 초가집인 상태에서 이주하면서 집들이 좋아지긴했지만 이주비가 적어 대부분 빚을 얻어 집을 지었다”며“빚으로 인해 동네가 아직도 가난한 것 같다”고 했다.
오랜 농사일로 인해 아픈곳이 없냐는 말에 김씨는“안아픈곳이 없다 다 아프다”며“병원에 가서 10일분의 약을 지어도 날마다 먹는 것이 아니라 아플때만 하나씩 먹고 있다”고 강조했다.
마을주민들에 대해 김씨는“주민들이 서로 생활이 넉넉한 편은 아니지만 서로 이웃과 나눠 먹으려는 정이 있다”며 “힘든 농사일에도 견딜 수 있는 것은 주민들이 서로 도와가며 살아가는 우애가 있기때문이다”고 말했다.
자신의 아픈 몸생각보다는 3남2녀의 자식들이 몸건강히 살아가기를 바라는 김씨의 마음과 거칠게 갈라진 손은 우리를 낳고 키운 어머니의 참모습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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