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현재 청자제작 공방터 건물지는 당시 대구소 터"
[특집] "현재 청자제작 공방터 건물지는 당시 대구소 터"
  • 김철 기자
  • 승인 2017.01.13 15:1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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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청자 재현 성공 40주년 기념 - 왕립 관요 대구소에 대한 고찰

강진군청 윤순학 기획홍보실장이 강진군 대구면 사당리 청자박물관 경내 청자제작 공방터에서 건물지를 가리키며 대구소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천년 비색 고려청자의 제작과정을 포함해 강진의 역사와 문화에 남다른 관심을 보여온 강진군청 윤순학 기획홍보실장이 바쁜 공직생활중에도 최근 왕립 관요로 추정되는 대구소에 대한 견해를 밝혀왔다. 다음은 윤 실장이 본지에 보내 온 고찰 내용이다.

신라 고려 조선조 전기까지 특수한 지방하급행정 구획으로 '향', '소', '부곡'이 편제 운영돼 왔다. 고려는 재정확보와 각종 물품의 안정적 확보를 위해 특정 광산물과 농수산물, 수공업품을 생산하는 다양한 소를 운영했다. 전업적으로 생산한 물품을 상공과 함께 중앙 각사(各司)가 요구하는 별공을 통해 공납하면서 국가재정의 일부를 담당했다. 소안에는 소민을 관리하는 토성리(土姓吏)인 소리(所吏)와 공장, 역호들이 있었다.
 

◇ 신증동국여지승람'대구소가 강진현 남쪽 30리에 있다'
조선시대 중종때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대구소가 강진현 남쪽 30리에 있다. 칠량소가 15리'로 기록돼 있는 점으로 보아 강진현 남쪽 30리는 대구면 사당리 일대로 보인다. 그렇다면 대구소의 위치가 궁금하다.

1964~1965년 국립중앙박물관의 발굴조사 때 가로 16.7×세로10.1m 직사각형 구조로, 지름 60~70cm 정도의 주춧돌이 외곽선을 따라 규칙적으로 놓여 있음을 확인했다. 발굴 뒤 이 건물지를 '청자제작 공방터'로 추정해 철책으로 보호 관리하고 있다.

고려청자박물관 건립에 직접 업무를 담당했던 1994년, ㈜협진개발 문화재 부 관계자는 "1994년 박물관 주변 서편진입로 공사를 하던 중 옛것으로 보이는 정교하게 다듬어진 돌 기단석 10여m를 발견했으나, 훼손하지 않은 채 흙으로 덮은 뒤 진입로를 개설했다"고 귀띔해 줬다. 당시 그 말에 귀담아 두지 않다가 2003년 청자사업소장으로 근무하면서 기단석이 있었다는 말을 상기했다.

작업장 앞 18m 지점에 정교하게 다듬어진 기단석이 있다면 틀림없이 대구소 자리가 아닐까 추측하면서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었지만 문화재보호구역 관계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 국제학술회의 통해 "청자제작 공방터는 대구소 터"
지난 해 11월25일 민족문화유산연구원 한성욱 원장은 '대구소'에 관해 중요한 정보를 제공했다. 원장 본인도 '청자제작 공방터'를 대구소 건물터로 추정하고 있다는 주장을 하면서 지난 2015년 장보고 국제학술회의때 발표된 논문집을 보내왔다.

논문집에 실린 경기문화재단 김성범 문화유산본부장의 '완도 법화사지의 고고학적 발굴성과와 정비복원에 관한 제언'에 관한 발표 논문 중 청자 관련 부분을 발췌해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완도읍 장좌리 일원에 있는 법화사지는 1990년 발굴조사가 이뤄졌다. 이 때 청자해무리굽저부편, '고림사(?)조성주지(?)대사'로 추정되는 명문기와 등이 건물지 내부에서 출토됐다. 또 암거시설 내 바닥에서 고려시대 당초문암막새와 '癸卯三月大匠惠印(계묘삼월대장혜인)'명문와, 순청자편, 상감청자편, 백자편, 인화문분청사기편, 호 구연부편 등이 함께 출토됐다. 다른 건물지 내에는 순청자와 투각청자편이, 북단 모서리 기단 석렬 안쪽에서 '숭녕중보'(중국 송나라 휘종 1102~1106년 주조)가 출토됐다.

법화사지에서 출토된 청자상감국화문대접은 고려 명종의 능인 지릉에서 출토된 상감청자와 같아 명종 재위기간(1170~1197)을 고려하면 편년이 대체로 12세기 말에 해당된다.

청자와 함께 주목할 것은 세트로 확인된 수막새이다. 이는 진도 용장산성에서 출토된 연화문 수막새·당초문암막새와 전체적인 기형과 문양이 동일해 같은 주형으로 만들어서 생산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법화사지에서 출토된 '계묘삼월대장혜인'이 새겨진 기와와 일부 동일한 명문과 문양을 가진 기와편이 신안 신용리 건물지와 삼별초 중심 거점 성이었던 진도 용장산성 그리고 고려청자의 산실인 강진 사당리 요지에서도 확인됐다는 사실은 매우 주목되는 점이다.
 

강진군 대구면 사당리 청자박물관 경내 청자제작 공방터를 알려주는 안내문.
◇ 강진·완도·신안·진도 출토 기와편 같은 곳서 제작 추정
경향신문 1965년 10월6일자 '청자의 고향' 기사에 의하면 '1965년 국립박물관 최순우 미술과장이 통솔하는 7명의 발굴대원들(주인 이용희)이 울타리 뒤 조밭을 헤치고 트렌치를 넣었고, 청자편의 퇴적층과 가마자리를 확인하는 일을 시작했다'며 말미에 '발굴대는 이번 청자파편의 퇴적층에서 의외의 크고 호화스러운 보통기와를 얻었는데 이것은 아마도 대구면 청자가마 정부관리동 건물의 유물이 아니었을까 하여 주목거리가 돼 있다. 13세기 후반의 청자편들 틈에서 나온 보통기와에는 '계묘3월대장혜인'이란 글귀가 나타나고 있었다'라고 기사화돼 있다.

이상의 근거들을 살펴볼 때 대구면 사당리에서 출토된 청자상감편과 '계묘삼월대장혜인'이 새겨진 기와는 완도 법화사지에서 출토된 상감청자편과 기와명문이 일치해 같은 시대일 것으로 추정된다. 또 신안 신용리 건물지와 삼별초 중심 거점 성이었던 진도 용장산성에서 출토된 기와명문과도 일치해 4곳 기와의 생산지가 동일함은 물론 같은 시기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를 가능하게 하는 요소는 강진지역이 고령토가 무진장 매장돼 있다는 점이다. 청자와 기와생산에 필요한 고령토가 풍부해 대구면과 칠량면 등 수많은 가마터가 있었던 곳으로 미뤄 볼 때, 강진지역 존치했던 8개 소 중 어느 한곳의 '소'에서 기와를 생산해 강진 사당리, 완도 법화사지, 신안 신용리, 진도 용장산성 등 당시 공공기관에 공납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을 것으로 유추해 볼 수 있다.
 

◇ 대구소 건물 추정 뒷받침 각종 지명 수두룩
결론적으로 4개 지역의 명문기와는 전체적인 기형과 문양이 동일해 같은 주형에서 만들어 생산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 기와와 함께 출토된 상감청자는 고려시대 12세기 말에 해당된다. 명문기와를 공납 받았던 이들 지역은 고려시대의 공공건물임에는 다른 견해가 없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사당리 청자파편 퇴적층에서 호화스런 명문이 새겨진 12세기경의 보통기와가 출토된 점, 와편이 발견된 연접한 곳에서 건물에 딸린 기단석 존재, 발굴 당시 '대구면 청자가마 정부관리동 건물' 유물이라는 점을 종합해 볼 때 현재 '청자제작 공방터'로 관리하고 있는 건물지는 '대구소' 건물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를 직·간접적으로 뒷받침해 주는 지명이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는 웃마을 동쪽 골짜기 국굴 또는 교골이라 부르는 향교기동과 죄수를 가두었던 곳으로 추정되는 옥산쟁이, 객사동과 사직단 등 당전마을 중심으로 분포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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