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유작시집 통해 서로를 알아본 신석정 시인
[특집] 유작시집 통해 서로를 알아본 신석정 시인
  • 김철 기자
  • 승인 2016.12.09 1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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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구시인 시백이라 칭송... 항일정신 공통점

지난 1970년 현구선생의 유작시집에는 눈에 띄는 서문이 하나 보인다. 대표적인 저항시인인 신석정 시인이 현구선생의 유작시집에 적은 글이다.

그 글을 보면 "내가 현구시백을 처음 만나게 된 것은 40년전 시문학 지상에서였다. 남북으로 300여리 떨어져 살던 우리는 좀체 상면의 기회를 마련하지 못하고 지내다가 다난한 세로에서 끝내 단명을 달리하고 이제 현구시백의 유고집에서 몇자로 서를 얹게되니 차라리 내 욕진 인생이 부끄러울 따름이다.

한 이파리 꽃잎이 언덕에 고이 져도 누리에 빛나는 설움에 젖어드는 이 시인의 꺼질 듯 아름다운 마음이 오래 우리를 지켜주지 못하고 떠난 것을 다시금 슬퍼하고 아울러 지하에 계신 현구시백께 감령의 예의도 갖추지 못하는 것을 아울러 가슴 아프게 생각하면서 총총히 붓을 놓는다. 1970년 2월17일밤 비사벌초사서당에서"라고 적혀있다.

이글은 현구선생의 가족들이 유고시집을 만들기 위해 신석정 시인을 찾았고 흔쾌히 서문을 써주면서 적은 글이다. 글에서 보듯이 현구선생과는 한번도 본적이 없었고 글을 통해 서로를 알고 있는 상태였다. 신석정 시인은 현구선생에게 시백이라는 극찬을 쓰면서 글의 서문을 마무리했다.

비록 얼굴 한 번 보지 못했지만 현구선생에 대한 최대의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이런 표현과 함께 현구선생에 대한 교감이 오고 간 것이 분명하다. 이유는 무엇일까. 그리 넉넉하지 않는 가정형편과 강직한 성품, 저항시인이었던 그들의 공통점이 전해진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신석정 시인은 아버지 신기온과 어머니 이윤옥 사이의 차남으로 1907년 음력 7월7일 전라북도 부안군 동중리에서 태어났다.

부안에 위치한 석정문학관.

부안보통학교를 입학한 신석정은 학교때부터 항일정신을 알리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6학년때 수업료를 내지 않았다는 이유로 한 학생을 옷을 벗겨 개구멍으로 나갔다 들어오게 하는 사건이 있었다. 당시 담임선생은 일본인이었다. 이에 신석정은 전교생을 선동해 항의했고 이에 신석정은 무기정학을 받고 다음해에 복학해 졸업을 하게 된다. 하나의 작은 일화지만 옳은 일이라고 결심하면 언제나 앞장을 서는 신석정이었고 훗날 자연친화의 서정시와 시대상을 담은 참여시를 쓰는 모습을 보게된다.

18세가 되던 1924년 3월 영광에 사는 진외가집 동생되는 남궁현을 만나게 되고 그를 통해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과 창조 창간호를 접하게 된다. 또 석정은 남궁현의 권유로 시를 투고하게 된다. 이 작품이 바로 석정의 첫발표작인 기우는해로 1924년 11월 24일자 조선일보에 게재된다. 1930년 서울로 상경한 신석정은 지금의 동국대학교 전신인 중앙불교전문학교 박한영 스님 문하에서 철학과 문학을 틈틈이 익히고 문학에 뜻이있는 승려를 귀합해 원선(圓線)이라는 회람지를 만들기도 한다.

석정의 등단은 1931년 10월 시문학 3호에 시 선물을 발표하면서 부터이다. 당시 시문학지를 만들던 박용철과 만나게 되면서 시문학 동인이 된다. 이때부터 시문학사를 거점으로 박용철·정지용·김영랑·김기림 등과 교류를 갖게 된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석정은 고향으로 돌아오게 된다. 전원에 대한 꿈을 버리지 못하고 고향에 청구원이라고 이름짓고 시를 쓰게 된다. 이런 어려움속에서 1939년 첫 번째 시집 촛불을 발간하게 된다. 임께서 부르시면,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등이 들어간 시집은 현실에서 피해가고 싶고 어머니를 통해 먼나라에 대한 동경을 나타냈다. 먼나라는 암울한 시대를 벗어나는 의지를 소망하고 있다.

김환생 사무국장이 석정문학관을 소개하고 있다.

그동안 석정은 1954년 전주고등학교 교사로 근무했고 전북대학교에서 시론을 강의하기도 하였다. 1961년 김제고등학교, 1963년부터 1972년 정년퇴직 때까지는 전주상업고등학교 교사로 근무하였으며 1967년에는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전라북도지부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1973년 12월 21일 전북문화상 심사 도중 뇌혈전증으로 쓰러진 석정은 200일이란 기나긴 시간을 병상에서 투병했으나 1974년 예순여덟으로 생을 마감했다. 이런 상황을 보면 거의 인생의 마지막에 현구선생의 유작시집에 글을 전해줬다. 그런 것이 더욱 의미를 더하고 있다.

석정의 좌우명은 지재고산유수(志在高山流水)였다. 뜻이 높은산과 흐르는 물 즉 자연에 있다는 뜻이다. 자연에 귀의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서 지조를 지키고자 하는 신념과 기개를 보이는 석정의 좌우명이다. 이런 강직한 성격의 신석정 시인이 또다른 강직함을 지닌 현구선생을 서로 이해하고 알아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신석정 시인 연보
·1907년 7월 7일 전북 부안읍 동중리 303-2번지 출생
·1917년 부안 보통학교 2학년 입학
·1924년 조선일보 기우는해 소적(蘇笛)필명으로 발표
·1930년 중앙불교전 박한영 스님 문하에서 불전 연구
·1931년 시문학 제3호에 '선물' 발표
·1932년 낙향해 청구원(靑丘園) 생활 시작.
·1939년 첫시집 '촛불' 인문사에서 간행.
·1947년 제 2시집 슬픈목가 부안 낭주문화사 간행.
·1954년 전주고등학교 교사로 근무
·1961년 전주시 남노송동 이사. 비사벌초사라 명명.
·1972년 전주상업고등학교에서 정년.
·1974년 전북 임실군 관촌면 신전리에 묻힘.
·2000년 부안군 행안면 역리 묘소 이장.
·2007년 유고시집 '내노래하고 싶은 것은'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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