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마량항'에서 고대 해로(海路)의 영광을 찾다
[기고] '마량항'에서 고대 해로(海路)의 영광을 찾다
  • 강진신문
  • 승인 2015.05.24 2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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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한성 · 강진군청 노인복지팀장>

강진은 예부터 살기 좋은 곳, 아름다운 자연환경을 지닌 곳이라 일컬어져 왔다. 고려청자를 연상케 하는 푸른 하늘과 온화한 기후, 탐진강과 이에 연한 수려한 청정의 해안들, 여기에 더하여 알맞게 펼쳐진 산과 기름진 들녘은 일찍이 사람이 살기에 손색 없는 삶의 터전이었다.

과거 육로가 발달하지 못한 시기에 바닷길(海路)은 중요한 수송 수단이었으며, 마량은 서남 해안의 바닷길과 한반도를 연결하는 육로·해로상의 요지로서 그 역할을 다했다. 멀리는 제주도, 중국, 일본까지도 나아갈 수 있었으며, 역으로 해로를 통해 건너온 인력·물자 등이 강진만과 탐진강을 따라 내륙 깊숙이 들어올 수 있었다. 문헌상『삼국사기』동성왕 20년조(서기 498년)를 보면 이때에 비로소 백제가 탐라(제주도)를 복속시켜 항복받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이 정복은 백제의 끝인 서남해안의 바닷길이 유력하며, 특히 강진지역을 중심으로 한 해로가 그 중심축이었다. 이는 1985년 제주신문사가 제주대학교 등의 도움을 받아 시도한 『고대제주해로 테우 탐사』(제주에서 강진 마량포구까지)의 보고서에 의해 확인이 된바 있다.

이처럼 해로를 통해서 강진은 제주도와 오랜 인연을 맺게 되는데 이를 입증하는 사료가《고려사》지리지(1451년)와《신증동국여지승람》(1530년)이다. 이 사료들에 따르면 강진의 옛 이름인 '탐진(耽津)'이란 지명이 제주의 옛 이름인 '탐라(耽羅)'와 서로 연결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고려사》지리지에서는「고을나의 15대손인 고후와 고청 등 형제 3인이 바다를 건너 탐진에 이르니 때는 신라의 성시(盛時)라…읍호(邑號)를 '탐라'라 하니 이것은 올 때 처음으로 탐진에서 상륙하였기 때문이다」라고 하여 탐라의 지명이 탐진에서 유래되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이와는 반대로 《신증동국여지승람》제37권에서는 「구십포(현재의 구강포) 현(탐진현)의 남쪽 6리에 있다… 탐라의 사자(使者)가 신라에 조공할 때 배를 여기에 머물렀으므로 이름을 탐진이라 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서로 상반된 기록이지만 탐진과 탐라의 지명이 어디서 유래가 되었던 간에 강진과 제주도는 해상교통의 요지로서 서로 인연을 맺고 있었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이렇듯 마량항은 천혜의 입지적 조건 때문에 예로부터 강진 발전의 교두보 역할을 했다. 예컨대 마량포구는 고려청자의 최대 생산지에 연하여 크게 발전하였고, 한반도와 중국, 일본 그리고 제주도 등 도서지방을 연결하면서 국내 해상교통의 한 교역항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그런데 이곳에 얼마 있지 않으면 '마량 놀토 수산시장'이 개장하고 더불어 강진만 해양레포츠타운 조성(2018년 완공), 강진 마량간 국도 23호선 확·포장(2019년 완공) 등이 이루어지고, 마량 제주간 화물선 취항 등 뱃길이 열리게 되면 고대의 영광을 되찾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강진군에서 역점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4대 핵심 프로젝트 '마량 놀토 수산시장'의 성공은 절실해 보인다. 외지에서 찾는 관광객을 맞이하기 위해 전 군민이 똘똘 뭉쳐 홍보와 행사 참여에 동참하고 지원에 최선을 다해 주시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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