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진옹기배 로드탐사 남해안 관광자원 확인
강진옹기배 로드탐사 남해안 관광자원 확인
  • 주희춘 기자
  • 승인 2010.10.15 09:5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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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여수 옹기로드 450km를 가다 - 4
▲ 봉황호가 9월 15일 오전 마지막 정착지인 여수시 중앙동 이순신장군 광장으로 접근하고 있다.

강진옹기 위상강화, 사공의 문화재적 가치 확인 등 큰 성과
아쉬움 남기고 3박4일 항해 매듭... 과거 항해는 부산까지 이어져


넷째날 항해 : 여수시 소호동 소호요트장~ 여수시 중앙동 이순신장군광장



봉황호가 여수시 소호동 소호요트장에 정박한 9월 14일 밤, 저녁내내 비바람이 불었다. 짐칸에 누워 파도가 목선에 부딪치는 소리를 들었다. 쾅쾅 댔다. 언제 어떻게 잠이 들었는지 모른다. 어느때, 밖이 요란한 소리에 잠을 깼다. 새벽이었다. 시간을 보니 새벽 5시가 조금 넘어가고 있었다.
 
빗줄기가 강해지자 탐사대원들이 배위로 올라가 비설거지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비바람 소리와 파도소리에 사람들의 목소리가 찢어졌다. 고함을 지르며 의사를 전달하고 있었다.

큰 비닐이 깔리고 그 위를 작은 옹기로 고정시켰다. 빗물이 짐칸으로 스며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순식간에 비상조치가 끝났다.
 
"도깨비도 뱃놈 집짓는 것은 못따라 온다고 했제"
신연호 사공이 농담을 했다. 뱃사람들은 항해중에 폭풍우를 만나면 재빠르게 비설거지를 하기 때문에 도깨비도 못따라 한다는 말이었다.
 
배위에서 일어나는 비상상황은 목숨과 직결되는 일이다. 조금만 늦게 대처해도 엄청난 재앙으로 이어지는게 뱃일이다.

돌풍  상황에서 돛의 방향이 조금만 틀어져도 배가 전복되는 상황을 맞을수도 있다. 그래서 뱃사람들은 비상상황 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엄청난 힘을 쏟아낸다고 했다. 목숨을 지키기 위해서다.
 
봉황호와 항해를 함께 한 범선 코리아나호의 항해사도 비슷한 말을 했다.

요트가 항해할 때 배가 뒤집히거나 돛이 훼손될수 있는데 그런 상황이되면 선원들은 평소의 3~4배 이상 힘을 쏟아 밧줄을 당기고 늦추며 위기상황을 헤쳐나간다는 것이다.
 
코리아나호의 항해사는 "바다위 위기상황에서는 선원들로부터 알 수 없는 힘이 나온다"고 말했다.
 
옛날 바다일은 누구도 예측하기 어려웠던 시절, 돛배에는 부자(父子)가 함께 타지 않았다는 말이 있다. 많은 사람들은 그 이유에 대해 '사고가 나서 부자가 죽으면 대를 이을 수 없기 때문'이라거나 '위험상황에서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 살아나가라고 양보하면 오히려 더 위험해 질수 있기 때문'이라고 이야기 한다.
 
모두 틀린 이야기는 아니지만 가장 큰 이유중의 하나는 생과 사가 엇갈리는 상황에서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 먼저 살아 나오려고 발버둥 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왕년에 선원을 했던 봉황마을 어르신들은 그 말을 소중하게 기억했다.
 
바람이 사정없이 불고 배위에 바닷물이 차오를 때 배위의 사람들은 가족도 분간 할 수 없는 사경을 헤매게 된다. 서로 상소리가 튀어나오고, 자신의 목숨만을 부지하기 위한 동물적인 본능이 횡횡할 수 있기 때문에 부자지간은 한 배를 타지 않았다는 것이다. 바다위에서 겪는 생사의 갈림길은 그렇게 절박한 것이었다.
 
소호항의 파도가 더욱 거세졌다. 탐사대원들이 뱃전에 웅크리고 앉아 남쪽 하늘이 맑아지기를 기다렸으나 검은 구름은 짙어가고 빗방울은 커져가기만 했다. 이곳에서 한시간 정도만 가면 봉황호의 마지막 종착지인 여수시 중앙동 이순신장군 광장이다.
 
새벽부터 일어나 비설거지를 한 탐사대원들이 배고픔을 호소했다.
"뱃놈들은 이런날 굶어버리는게 상책이여"
 
신연호 사공과 원희봉 조동무는 비바람이 치는데 식사를 할 필요가 있겠느냐고 한마디 했다. (한끼 굶으면 편할 것을) 비바람 맞으며 쌀 씻어서 불피우고 밥지어서, 먹고, 또 설거지할 불편을 겪지 말자는 것이었다.
 
신연호 사공과 원희봉 조동무가 옛날 옹기를 팔러다닐 때 기상이 나쁘면 늘 그렇게 했던 일이었다. 그래서 '날씨가 궂으면 뱃놈들은 굶는게 상책이다'는 말도 생겼다. 이런 상황에서 사공에게 가장 큰 관심은 비바람을 뚫고 어떻게 목적지에 도착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코리아나호가 봉황호를 예인하기 시작했다. 이순신장군 광장은 지척이었다. 배가 돌산대교를 돌아서자 목적지가 보이기 시작했다. 좌우측으로 아파트촌이 지나갔다. 어느덧 비바람이 멈추었다.
 
▲ 봉황호가 도착하자 강진에서 온 군청공무원들이 옹기하역을 돕고 있다.
멀리 이순신광장에서 봉황호를 환영하는 사람들의 손짓이 보였다. 강진군청에서 온 사람들이었다.

이번 옹기로드탐사는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와 목포대도서문화연구원, 강진군이 함께 주최를 했는데 강진군의 실무부서가 경제발전팀이었다.

토요일인데도 백종일 팀장과 팀원들이 여수로 와서 봉황호의 무사항해를 환영해주고, 광장에서 열릴 환영행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배가 안전하게 도착했지만 200여개의 크고 작은 옹기를 내리는 것도 보통일이 아니었다. 탐사대원들이 배위에서 옹기를 내리고 군청 직원들이 하역을 도왔다. 옹기배와 육지를 연결한 것은 긴 판자로된 나무 다리였다.

긴 나무다리는 사람들의 걸음걸이에 따라 심하게 출렁거렸다. 그 위로 무거운 옹기를 짊어지고 내리는 것은 상당한 기술이 필요한 일이었다.
 
이순신 광장이 갑자기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봉황호에서 내린 옹기로 광장에 장이 섰다. 사람들이 몰려들어 옹기를 흥정했다. 사물놀이패가 꽹과리와 북, 장고 등을 치며 분위기를 돋구웠다.
 
광장에서 백정철(69)씨를 만났다. 백씨는 칠량 봉황이 고향이었다. 옹기배를 타고 장사를 하고 다니다가 30여년전에 이곳 여수에 정착했다. 백씨는 지금도  전북 고창에서 옹기를 가져다 노상 판매를 하고 있다.
 
▲ 여수에서 옹기장사를 하고 있는 칠량 봉황출신 백정철씨.
백씨는 "TV에서 고향 옹기배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나왔다. 옹기배가 여수항에 들어오는 것을 보니 정말 감회가 새롭다"고 했다.
 
봉황호 환영식에서 박기성 여수시 문화건설관광국장은 "300리 바닷길을 헤치고 무사하게 여수까지 온 봉황호의 안전항해를 축하한다.

여수엑스포를 앞두고 열린 옹기로드 탐사는 앞으로 해양문화개발을 위한 중요한 계기를 마련 한 것이다"고 말했다.
 
강진옹기배 해상로드 탐사는 이렇게 여수에서 끝을 맺었다. 원래 옹기배는 여수에 들려 며칠을 정박했다가 다시 경남 남해군을 거쳐 충무시로 가고, 이어 통영~거제~마산~부산으로 이어지는 길고 긴 항해를 계속했다.
 
이번 옹기뱃길탐사는 수확이 많은 여정이었다. 우선 강진옹기에 대한 이미지를 크게 높였다. 옹기배 항해 재현은 현대인들에게 대단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것이었다. 웰빙시대에 한참 뜨고 있는 옹기의 가치가 이번 기회에 더 많이 올라갔다.
 
또 여수엑스포를 앞두고 남해안에 다양한 관광자원이 있다는 것을 확인시켰다. 옹기배 탐사로드에는 많은 볼거리와 다양한 이야기거리가 산재해 있었다. 이를 고대뱃길과 연계 복원할 경우 남해안의 새로운 관광자원이 될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
 
또 한가지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배의 선장격인 사공에 대한 문화재적 가치가 새삼 증명됐다는 것이다. 사공은 뱃길를 정밀하게 파악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또 배의 안전항해를 위해 다양한 대처를 할 수 있어야 했고, 무엇보다 우리의 전통 한선인 돛배의 기능과 운전방법에 정통한 전문가였다.
 
이번에 사공을 맡은 신연호(80)옹은 지난해 청자선 온누리호 항해에 이어 올해 봉황호를 통해 사공으로서의 실력과 능력을 확실하게 인정받은 분이다. 이몽룡 목포대도서문화연구원장이 봉황호 출정식때 사공의 인간문화재화에 대해 필요성을 제기했고, 황주홍 군수도 공감을 표시했다. 그분에 대한 문화재적 평가가 반드시 필요하리라고 본다.

▲ 봉황호에 탑승한 탐사대원들. 이들은 항해 책임에서부터 밥하는 일까지 각자 맡은 역할을 다하며 성공적인 항해를 가능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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