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기행>100<-칠량면 영계마을
마을기행>100<-칠량면 영계마을
  • 조기영 기자
  • 승인 2003.03.20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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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차례 봄비가 내린 후 들녘의 푸른 새싹들은 어느새 제 색깔을 내고 있었다. 만물이 생동하는 희망찬 새봄은 어느덧 우리곁에 성큼 다가와 있었다. 한낮 따스하게 내리비추는 봄햇살은 바쁜 생활 속에 잊고 지냈던 계절의 변화를 새삼 느끼게 한다.

강진읍에서 출발해 4차선도로를 시원하게 달리다 칠량면소재지를 지나 관산 방향으로 한참을 올라가면 야트막한 산들로 둘러싸여 있는 영계마을을 만날 수 있다.

영계마을은 크게 본마을인 계동, 영평동 그리고 새밭들로 나뉘는데 마을은 할미봉, 시루봉, 족박뫼로 둘러싸여 있어 겨울철 추위를 막아주어 아늑하고 마을 입구는 평야로 확 트여있어 여름철이면 남풍의 영향을 받아 시원하다.

마을에 처음 입향한 성씨는 조선시대 청송심씨가 들어왔고 다음으로 청주김씨, 성산배씨등이 입촌해 마을을 형성하였다. 현재 영계마을에는 64가구 140여명의 주민들이 미맥농사와 장미재배를 주업으로 생활하고 있다.

영계마을에는 마을 진입로를 따라 들어오다 계동과 영평동으로 가는 삼거리인 고라실, 계동 동쪽에 있는 산등성이인 납쟁이, 납쟁이 근방의 들판을 이르는 도절목, 동학운동때 마을의 동학군들이 관군과 일본군을 피해 은신했다는 동학구덩이, 관군과 일본군의 약탈을 염려해 마을 주민들이 돈을 숨겼다는 돈구덩이, 영평동 옆 산골짜기로 흡사 아궁이(부삽)처럼 깊다고 하여 부른 부삽골, 계동마을 지키는 돌비석이 세워져 있어 일컫는 비석거리, 시루봉 안에 있는 골짜기로 상여같이 생긴 바위가 있어 부르는 생여바위골, 할미봉 넘어 삼흥리 신흥 땅골과 경계가 되는 연기골, 마을 중앙에 있는 큰 샘으로 과거에 우물속에 돌을 쌓고 위는 나무통으로 만들었다하여 부른 통샘, 천연두(손님마마)나 홍역을 앓게 되면 전염을 우려해 사용했다는 손님샘등이 마을 곳곳에 명칭되고 있다.

미리 연락을 하고 찾아간 영계마을회관 앞에서 마을일을 맡아보고 있는 이태홍이장을 만났다. 이이장은 “우리 마을 이름이 영계여서 인근마을에서 우스개 소리를 하는 사람들도 더러 있다”며 “마을 주민들이 새로운 영농기술을 도입하고 생활개선을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하고 있다”고 마을 자랑을 했다.

옆에 있던 심경식(62)씨는 “할미봉과 족박뫼가 좌우에 있고 시루봉이 마을뒤에 버티고 서있어 풍수지리적으로 명당에 해당된다”며 “어릴 때부터 할미봉에서 할미가 나와 시루봉에 시루를 걸고 부삽골에서 불을 떼면 연기골에서 연기가 난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고 덧붙였다. 또 심씨는 “우리 마을 출신들은 시루봉만 보면 아무리 마을의 모습이 변했어도 금방 알아본다”며 “광주에 있는 향우회 이름이 시루봉으로 출향인사들이 시루봉에 대한 애착이 많다”고 덧붙였다.

일제시대 영계마을은 들이 좋아 박하와 면화 주산단지였으며 60년대 삼흥저수지가 만들어지면서 밭이 논으로 전환되면서 미맥농사를 주로 하고 있다.

영계마을에서는 현재 3농가가 장미를 재배하고 있다. 시설하우스에서 장미 출하를 준비하는 있던 배정길(63)씨는 “지난 89년부터 딸기, 오이등을 재배해 오다가 현재는 장미를 주로 재배하고 있다”며 “지난 91년 오이를 재배해 관내에서 처음으로 일본에 수출했다”고 말했다.

과거 마을에 물이 귀해 크고 작은 5개의 공통샘에서 전주민이 식수를 조달했으나 식수가 늘 부족한 형편이었다. 지난 83년 시루봉 뒷 골짜기 계곡물을 수압을 이용해 간이상수도 시설로 끌어옴으로써 현재는 대부분의 가구가 이 상수도를 이용해 식수문제를 해결했다.

다시 찾은 마을회관에는 여러명의 마을주민들이 모여 즐거운 시간을 갖고 있었다. 마을주민 이정숙(여·67)씨로부터 계동내 입석 2기에 얽힌 재미있는 설화를 들을 수 있었다. 100여년전 마을에 초당댁이라는 여자가 살고 있었는데 어느해 이름모를 돌림병이 마을에 돌았고 초당댁이 치성을 다하여도 그치지 않았다. 어느날밤 초당댁의 꿈에 산신령이 나타나 마을앞 연못속의 두개의 돌기둥을 꺼내 마을입구에 비석으로 세우면 마을의 우환이 없어질 것이다 하였다. 다음날 마을주민들이 두개의 돌기둥을 마을입구에 세우니 극성을 부렸던 돌림병이 씻은 듯이 나았다.

이후부터 우환이 있는 집은 외로 꼰 새끼줄을 비석에 감고 치성을 올렸고 손귀한 집에서는 아들을 낳으면 문간에 쳐놓은 금줄을 비석에 다시 치고 아이의 무병을 빌었다.

마을 주민들은 마을회관앞에 서있는 입석을 할멈이라고 부르고 송계정 옆에 서있는 입석을 영감이라 칭하며 매년 대보름에 전염병 예방과 우환방지를 위해 입석제를 지내고 있다.

마을을 나오면서 새밭들에 있는 영계고인돌군을 찾았다. 청동기시대의 무덤인 고인돌 총 26기가 어지러이 널려 있었다. 이 고인돌군은 도지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음에도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는 상태였다. 영계고인돌군이라 씌인 입간판이 하나 서 있을 뿐 보호를 위한 어떠한 시설도 없이 잡초만이 무성하게 자라있었다. 규모나 형식면에서 강진지역의 대표적인 고인돌군이 아무런 보호를 받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 알 수 없는 미련을 남게 한다.

영계마을 출신으로는 법무부 사무관으로 근무하는 박광섭씨, 강진군청 민방위과장을 역임한 배경준씨, 칠량면장을 역임한 배윤씨, 교보생명 이사로 있는 박판영씨, 광주사레지오초등학교 교감을 역임한 배억씨, 광주시청 사무관으로 있는 유광종씨, 서울시 도봉구청에서 근무하는 배규철씨, 여수에서 해양경찰로 있는 배규진씨, 농협 도지부에서 근무하는 배규열씨, 초등학교 교사로 있는 김옥현씨, 지난 94년 금릉문화제 씨름경기에서 우승과 준우승을 차지해 형제씨름장사로 불린 박건양씨, 박건철씨, 강진군수로부터 효행상을 받은 최점술씨, 역시 효부상을 수상한 김월년씨등이 이 마을 출신이다.  

 

마을에서 만난사람

김신유 할머니


마을 안길을 따라 올라가다 마을회관으로 마을주민을 만나러 간다는 김신유(81)할머니를 만났다. 안풍마을 출신이라는 김할머니는 “19살에 영계마을로 시집와 60여년을 넘게 살고 있다”며 “처음 마을에 왔을 때 밭이 많아 밭매는 일이 너무 힘이 들었다”고 말했다. 김할머니는 “지금은 수리시설이 잘돼 있어 물을 마음대로 사용하지만 그때는 물이 귀해 마을앞 냇가까지 가서 빨래를 했다”고 회상했다.

5남 3녀를 두고 있다는 김할머니는 “자식들이 모두 고향을 떠나 살고 있어 집을 혼자 지키고 있다”며 “광주에서 교사로 있는 큰아들이 같이 살자고 하지만 집을 비울 수 없고 마을사람들이 좋아 혼자 생활하고 있다”고 말했다. 또 김할머니는 “세째 아들이 송촌마을에서 장미를 재배하고 있다”며 “전에는 소일거리삼아 매일 찾아가 꽃도 손질해 주고 했는데 이제는 힘들어 일주일에 두세번 정도 찾아간다”고 덧붙였다.

신유년에 태어나 신유라 이름지어졌다는 김할머니는 “가정형편 때문에 큰아들은 대학을 보내고 다른 자식들은 대학을 보내지 못한 것이 한으로 남는다”며 “자식들이 술, 담배하지 않고 착실하게 잘 살아주는 것이 너무 고맙다”고 말했다.

혼자 사시는 것이 적적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김할머니는 “마을주민들이 가족같이 대해주고 가까이에 사는 아들들이 자주 찾아와줘 외로움은 느끼지 않는다”며 “명절때 온가족이 모이면 평소에 조용하던 집안이 북적북적하다”고 답했다.

마을 자랑을 해달라는 부탁에 김할머니는 “어느 마을이나 똑같겠지만 마을사람들이 단합이 잘돼 대소사에 너나 할것없이 함께 한다”며 “인심좋고 부지런한 우리마을 주민들이 최고 아니겠냐”며 밝게 웃었다.

따뜻하게 손을 잡아주며 고맙다고 말하는 김할머니의 모습에서 우리네 어머니의 따뜻한 마음을 진하게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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